며칠 전 꾸었던 꿈이 할머니가 나를 응원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데려가는 의미였나.
2014년 8월 19일 파이가 내게 온 날.
2025년 8월 19일은 내 졸업날이 아니라, 아버지 심정지가 온 날.
올 게 왔군, 그리고 지금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였으면 여러가지로 움직이기 어려웠을테니까.
지금이 나아. 작년 파이 때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어제는, 작업은 모두 못하고, 바로 그 동네로 갔다.
예술대엔 그런 우스개가 있지.
헤어지면 더 그림이 잘 그려진다.
상실은 작업에 오프로드 길을 과감하게 밀어 터준다. 혹은 고속도로처럼 나아가도록 추진력을 준다.
내가 예술가의 재목일진 모르지만, 이럴 때면 작업 아이디어가 더 있다.
이를테면,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기록을 더 청취하고 녹화하여 만들어 놓을 걸, 이란 생각을 했다. 아버지에게 그것을 적용해볼 수 있겠지.
그 아버지 OOO은 누구인가.
아버지는 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좋아하고 나는 내가 아버지를 닮았음을 알기에 만나면 가깝게 여겨지나, 사실 아버지는 나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나도 아버지의 심리적 방어기재 등을 잘 학습하였을 뿐이지 공동의 기억은 매우 미약하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만큼, 원출처인 그의 툭- 튀어나온 부분들을 세상사람들보다 쉽게 포용 가능하나 그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나를 드러내지 않고 잘 참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건 어떤 훈련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족의 기억도 쌓아본 적이 잘 없다.
나는 말 그대로 혼자 컸는데, 혼자 알아서, 잘. 그러니까 이건 반항하듯 혼자 컸다는 말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말하듯 지붕을 공유하되 원망의 관계 속에서 자랐다는 것도 아니고.
지붕도 다르고, 경제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으며, 시간이 겹치지 않는.
보통 ‘원가족’이라고 하면 기대하는 디폴트 값이 있다면, 그리고 그 영점의 위치가 다른 관계형태들과는 응당 다르다면, 내 기준 부녀의 관계성은 분명 음수의 값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악에 받친 울분이나 이런 게 없다. 나는 그냥 받아들였고, 혼자 오프로드 길을 뚫어가며 자랐을 뿐이다.
그래서 생활력과의 트레이드 오프로 나는 사회적 관계에 약하다. 내가 제대로 반응하는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이 가족 속에서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나 복합적인 경험의 처리, 그 속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짐작도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전부이면서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아버지의 역할은 반면교사.
나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잘 하지 않고, 반성은 하나 후회의 길은 잘 가지 않는 편이다.
아버지에게 만약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은 든다. 만약 그 때 아버지가, 혹은 아버지에게 사회적 인풋이 달랐다면. 인과성에 의해 달랐을까.
그러면 내 삶도 달랐겠지.
머리 좋은 것에만 천착하는 우리네 과거의 평가방식이 한 사람을 얼마나 망칠 수 있는가.
분절된 사고들.
아직 내게 이것은 위로를 받을 일이 아닌데 사람들이 위로를 한다.
상실은 예정되어 있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매일 찾아갈 것인가.
아버지가 내 할머니를 외면했듯 내가 아버지를 외면하므로서 consequences를 완성할 것인가.
할머니는 꿈을 통해서 내게 보여주었다. 어떤 복수의 마음을 갖지 않길, 내 아들을 잘 보내어 그 길로.
그 꿈에서 할머니가 ‘내 말을 못알아 들었을까 두렵다’ 라고 하였다.
오늘에서야 정확히 알게되었다.
나는 아주 잘 알아들었다.
할머니는 역시 아들 걱정이구나.
드라마를 쓰려는 건 아니고. 그냥 이런 사회적 전통성이나 표준성에 맞지 않는 나의 가족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리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마치 락스타 같은 헤어컷에 수액을 맞아 혈색이 돌아온 얼굴로 ICU에 누워있었다. 심리적 불안감에 취약한 사람이라 일반병동으로 옮겨 지내기 편하도록 하였다.
여러 장기가 망가져 도착한 몸. 의사는 ‘살리고자’ 해야하는 책임과 뭘 하자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위치에서 고생했다.
파이보다 크레아틴 수치가 훨씬 좋은 이 환자는 심장을 빼면 그냥 괜찮은 노인이었다.
심장이 랜덤하게 설치된 폭탄처럼 예측이 어려울 뿐이다.
희망과 절망 모두 알리지 않았다.
여기에도 상실이 있을까?
어느 날에는 있겠지. 모른다.
상실을 미리 상상하고 나는 뭘 작업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