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동시에 두 이야기를 펼치는 내 눈과 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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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하루에 30분만 작업노트를 쓴다, 라는 룰을 갖고 있었다.

처음엔 20분이었는데, 나중에 30분으로 늘어났다.

그 때 작성하는 내용에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왜냐하면, 작업을 하지 않은 긴 시간이 있었고, 내가 무슨 작업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탐색, 모색하는 차원에서 봤다.

그 때에 이룬 일 덕에 이번에 교안 만드는 데에 도움을 받았다. 고마운 과거의 나, 잘했어~

10여년 간 촬영한 4만여장의 사진을 6개월 넘는 시간을 들여 다시 보고, 내 스타일의 색조정을 매일 매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거나 즐겨찾는 구도나 색이나 대상을 알아채기도 했다.

사진을 찍으면 흥미롭게도 그 찍은 시점의 기억, 그러니까 시각적 스틸 외에도 시간적 선후관계에 따른 맥락이나 영상적 기억, 기분.. 이런 것들이 후루룩 나타난다.

좋았건, 나빴건, 에피소드들이, ‘거기에 두고왔던 에피소드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사진으로 찍지 않은 기억도 그렇게 머릿 속 극장에서 입체적인 연극처럼 펼쳐진다. 사진촬영이 엮인 기억의 다른 점은, 트리거가 명확히 내가 보았던- 현재했던- 지나온 공간적 배경을 보여준다는 점이랄까. 그 트리거가 강력해서, 언제고 순수 기억에 의존한 상영회가 아니라 꽤 현실적인 단편영화가 펼쳐진다.

지난주 수요 수업 때에 사실 나는 내가 실수한 것만 같아서 너무 창피했다. 그리고 목요일 아침에 잠에서 깰 때에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거의 그와 동시에 이 모든 반응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을, 그러니까 그 극장이 나의 바깥 어디에도 펼쳐지지 않지만, 내 머릿속을 점유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극장의 위치는 양 눈의 위 어딘가, 대략 이마 같다. 거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상영회가. 영화관의 스크린 같기도 하고, 핸드헬드로 찍어놓은 3D 홀로그램 속이기도 하고, 아니면 나의 행동을 비판하고 우려하고 비난하는 어떤 얼굴없는 형체들의 우격다짐하는 듯한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꽉 채운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현실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씨어터가 두개라서 위아래를 나눈 게 아니라, 넓다란 시각정보용 창이 전면을 채우고, 그 창의 윗부분(head)에 어두운 돔의 모양의 공간같은 게 있어서 거기서 뭔가가 웅성웅성 대는 걸 느낀달까.

이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나는 아주 재빠르게 그 둘을 왔다갔다 하고 있는 건가?

언제부턴가 나는 내 시야와 시각정보를 제 3자가 영화를 보는 듯이 의식하고 있다. 마치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나의 눈은 그저 받아들이고 관찰하는 통로이고, 나는 이 통로, 아니 상영회에 참관한 사람 같다. 상당히 ‘남의 것’을 보듯 내 시야를 관조한달까.

이 글을 쓰면서도, 타자를 두들길 때, 키보드를 보며, 그 위에 펼쳐진 낮은 캘빈도의 바짝 선 빛줄기(하이라이트)와 섀도우 사이에서 미적 환희를 느낀다. 가벼운 환희. 가벼운 경외심. 가벼운 탄성. 이야, 우와 하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설명하려면 몇가지라도 꼽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 시각적 미에 준하지 않고 어쩌면 지금 여기에서 이 활동이 가능한, 이 안녕함을 구축한, 모든 인간의 기술과, 역사에 대한 경탄이기도 하다.

이 안녕의 수혜를 입는 나와, 그 안녕이 만든 안전한 상황을 바라보는 내가 따로 있다. 자아가 둘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저, 글을 쓰면서도 (뽑아내면서도), 움직이는 손에 흐르는 빛의 아름다움을, 그 기이함을 알아챌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도 이렇게 세상을 보고 있을까?

아차, 모두가 이렇게 사는데, 나만 이제서야 이 눈을 뜬 건 아닐까?

이상한 일은 하나 더 있다.

나는 청각적 뛰어남이 거의 없어서 몇배로 연습을 해야 알까 말까이다. 피아노를 몇 년 쳤으니 화음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뉴에이지나 재즈 교본 같은 책을 사서, 묵묵하게 매일 따라치고 있다. 튜터가 없으니 방법은 모르겠고, 음가를 제대로 써서 리듬까지 맞추는 게 목표가 아니라 그저 음정을 알아듣고자 했다. 코드를 쪼개서 이렇게 저렇게 쳐보거나 거꾸로 쳐보기도 하고, 갖고 놀기 위해서 노력했다. 전혀 ‘놀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 이거 이쁘다’ 하는 중첩된 음들은 만나고, 또 만나고 있다.

최근 가장 즐겨치고 좋아하는 곡 중 하나는 정재형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다. 그가 치는 것보다 조금 더 느리게, 음 묶음 사이사이에 아주 가볍게 공기가 머무는 시간이 있다. 쉼은 아니고, 그저 더 조금 늘여서 가져가는.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 연습을 하다하다 또 하다보니까 나타난 일일 수도 있는데.

그게.

음악의 어떤 부분을 지나갈 때엔 호일을 입에 문듯한 신 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사진의 질감적 표현으로 색상이 매끈하게 펼쳐질 때에 어떤 화음의 형태 같은 게 다가오기도 한다. 언제나 같은 언어적 규칙 안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니까 훈련을 하고 하고 또하고, 머리의 어느 부분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고 깨우고 매일 깨우면. 내 뇌의 다른 어느 부분이랑 길이 터지고. 그게, 이 자극이 저쪽의 출력으로 연결되는 걸까?

마치 동시에 두가지, 현실과 생각, 또는 현실과 기억, 현실과 감정을 관조하는 내 눈과 이마처럼.

사진을 하고 하고 또 하면 이런 두 채널을 갖게 되는 건가. 나는 마음으로부터도 거리를 둘 수 있다. 내 인생은 온통 ‘나’로 점유되어 있는데 (다른 사람의 몸을 통해 살 수 없으므로, 나는 평생 나와 함께이다), 막상 나를 상상할 수는 없다. 내 얼굴. 내 표정. 내 목소리, 내 말투, 내 행동.

내 얼굴와 목소리가 어려운 이유는 충분히 데이터가 쌓일만큼 본 적이 없어서일까?

수영이라면 내 속도감, 내 영법의 자세.. 이런 건 모른다. 바닥이 거울이면 좋겠다. 내가 말할 때 내 목소리 녹음해서 마이크로 들려주는 게 내 머릿속에 있다면 어떨까. 내가 말할 때의 내 모습이 구글 글라스 같아서 시야 한쪽에 띄워져 있으면?

오늘 시각적으로 가장 우아했던 장면 중 하나는. 너무나도 여럿이 있었지만, 이를테면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있는지 몰랐던 70년대 만들어진 듯한 어느 건물의 옆면, 하늘빛, 유선형 외부계산, 5-6층의 저층 건물의 외벽에 서쪽으로 넘어가는 빛이 거의 지면과 수평인 상태로 조사될 때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 모서리의 하이라이트.

그리고 또다른 아름다움은, 개교 100년여가 된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있는 든든한 나무 셋. 든든하다는 말로 부족하다. 그들의 아름드리는 몇명의 초등학생이 껴안아야 할까. 그들은 요즘의 그 기후 덕을 본 건지 그냥 아주 오래되서인지. 저어 멀리까지, 하늘을 향해 온몸을 뻗어내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거대한 잎이 바람을 타고 술렁였다. 비율로 보면 영락없는 브로콜리 같은 나무이다. 하지만 그 브로콜리는 아주 거대하다. 내 키의 열배.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또다른 시각적 아름다움은, 귀갓길. 밤. 비가 와. 한강진역 블루스퀘어 앞. 버스정류소에 앉아 맞은편 외국인학교의 자동차 출입로를 본다. 또 거대한 나무가 있다. 가로등보다도 더 더 큰 나무. 그 나무의 머리에, 가로등이 자리하고 있다. 한가운데에. 그래서 그의 빛이, 나무의 속을 보여준다. 나무의 머릿속을. 그의 큰 잎이 비를 맞아 흔들대면, 더 안쪽이 보인다. 나무 잎과 잎과 잎의 안쪽으로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몇개 층을 지나는 아름다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 30분이 지났다. 아니다 50분이 지났네.

오늘은 여기까지.

사진을 한동안 안만졌는데, 초등학교 수업이 끝나면 (내일임) 한동안 예약이 없으니 아마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겠지 싶다.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몇달간 발굴했는데, 이제 하반기부터 무슨 프로젝트를 선택하고 왜 하고 싶은지 그로 말미암아 어떻게 진행하고 그게 중간완료가 되면 나는 그 프로젝트라는 배를 타고 어디즈음에 당도하여 누구를 만나고 있을지.

사진을 한동안 안만져서, 올라온 게 없네. 작업실에 모든 데이터가 있는 게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고. 분리를 하는 게 좋으려나.

교안에 예시로 다른 사람 사진이 아니라, 내가 찍은 걸, 심지어 양이 꽤 빽빽하니 많아서 ‘골라’ 넣을 수 있었는데, 그게 뭔가뿌듯했달까. 물론 작가 안내 수업이면 이렇게 하면 안되지만, 가벼운 기술의 예시를 보여주는 거니까.

그동안 내가, 사진을 20대에 그만둔 다음에도 아주 성실하게, 내 생활 속에서 꾸준히 찍었구나… 라고 느꼈다. 교안에 넣을 사진을 고르면서.

평생 나는 찍겠지. 죽는 날 전에도 찍고 있겠지. 이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현재엔 과거와 미래 모두가 중첩되어 있고, 그것들은 어디에 기록되지도 쓰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은 과거를 이쁜 돌멩이 줍듯, 떨어진 배춧잎을 모으듯 차곡차곡 정리해서 미래에 가져다 놓는다.

그렇다면 더이상 나의 미래가 없는 때에, 나의 과거도 (나의 사진이 없다면) 기억해줄(머릿속에서 재생할) 사람이 없는 그 때에, 마지막에 내가 떠난 뒤에, 그 사진들은 누가 갖고 있을까, 정리해줄까. 사용해줄까.

지금 해야지, 그러니까 해놔야지.

내가 나의 타자치는 손을 볼 수 있는 지금에, 나는 내 사진을 어여삐 여기고, 언제나 바랐던 대로, 사진에게 공기를 쐬어주고, 밖을 보여주고, 햇빛을 쪼여주도록 움직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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