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의식적으로 찍다보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주로 무엇을 눈으로 좇는 사람인지 알게된다
내 눈을 잡아 매달아서 핀을 꽂는 광경이 무엇인가. 주로 익숙한 건 내 몸 뿐인 낯선 지역을 다닐 때에 되려 알게된다. 내게 인식되는 광경을 찍는 동안 나는 나를 본다.
그러고 나서야 주로 그 시기의 내 마음과 닮은 모습들이 그 광경이었음을 안다.
깨어지지 않은 마음, 온전한 어떤 형태라는 마음은 사람에게 없다. 그런 사람이 찍는 사진은 어떨지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다 저마다 깨어진 구석이 있다. 거기에 햇빛을 쬐어주는 게 창작활동. 그래서 내 사진과 저 사람 사진 묶음이 같은 모습일 수 없다.
그 깨어진 부분은 성향과 상호작용과 경험으로 만들어지고, 필연적으로 다 다르기 때문에 한 개인을 한 개별적 존재로서 정의하는 수단으로 여겨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인생 어느 때에는 무엇을 봤고, 지금은 무엇을 볼 수 있는 사람인가
내 임시 두려움은 어디서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한동안 사진을 안찍었다, 낯섦을 피했다. 빛을 쬐어주지 않은 시간동안 곰팡이는 아주 작게 스멀스멀 마음의 구석진 곳에 흡착된다. 햇빛 아래에 드러내어 펼쳐놓고 빛을 쬐어주자.
그렇게 다시 물어보면,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길 바랐지’라고, 돌아올 답을 아는. 나는 이미 겪었다. (말이 이상한 것은, 지금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이제 말을 조합하는 방식을 내 마음대로 하기로 정했나. 영어의 문법이나 표현 순서에 한국어를 갖다 꽂기도 한다. 영어에게도 그런 한국어적 표현을 씌우면 공평하겠다.)
OO을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도 내려놓을 수 있다고 혹은 어느정도의 고통과 불안이란 감내하겠다고 작년 겨울에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질문을 묻고 글로든 말로든 제대로 답할 수 있을까. 매일 해볼까.
찾아야 한다. 아주 작은 보석. 공중에 떠다니는 마음을 땅으로 붙잡아줄 거대한 중력을 가질 아주 작은 반짝이는 무엇. 내 존재의 추. 내가 잡고 갈 하나의 줄기. 돌아올 곳.
언제든 돌아오고 기다릴 수 있는 일이며 가장 적은 고통과 가장 큰 수확을 줄 것이 약속되어진 일이라면, 그정도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무엇보다도 나다울 수 있는 나의 몫이며 그렇기에 내 것으로 여긴다면, 망설임을 등에 지고서라도 항상 그것을 수행하는 편이 낫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수록 세상에 덜 시달리게 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중년의 밥이 청년 샬롯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이란 그랬다.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조언도 다르지 않다 쨌든 눈 앞을 적확하게 보고 한발짝이라도 내가 본 방향으로 정확히 나아가는 일이란, 내가 뭘 보는 지 알고 있을 때에 생겼다. 의도한대로 간다. 명쾌하게도.
자전거, 수영, 달리기, 피아노, 글쓰기, 생각하기, 말하기, 대화하기.
종목에 상관없이 의도하지 않을 때면, 체간에 힘을 빼고 흐르는 대로 따라가려 표류한다면, 그를 의도했기에 바람에 물살에 피로감에 시간부족에 유혹에 노이즈에 따른다. 교란되고 헷갈리고 휩쓸린다.
그렇게 삶이 흘러간 뒤에 남은 게 무엇이었지? (물론 이점도 있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를 보상할 수 있는 건, 오늘은 행동을 교정해 결국은 지켜내는 것이다.
36컷 필름을 아주 알뜰 살뜰하게 잘쓰면 40여컷 정도 된다. 26-28장을 넘어갈 때부터는 내가 무엇을 찍어야 할지 아주 예리하게 생각하게 된다. 오늘 남은 필름이 이것 뿐이 없다면, 하나 하나 선택할 때에 더 조심하고 또는 섬세하게 대한다.
제약, 필요한 제약. 그래서 한 롤의 인덱스 밀착을 뜨면 어느 시점에는 각성을 했는지 사진이 유난히 좋을 때가 있다. 어느 형태든 제약이 있을 때에, 제약을 인식했을 때, 인식한 바에 따라 의도를 가졌을 때에 유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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