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공샷을 날리듯 엄청나게 찍기를 일주일. 이틀이 지나고 나면 20기가씩 잡아먹는 사진이 생겼다.
그 전에 회사를 그만둔 그 때부터 모두 다 잘못 된 선택인 거면?
나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나는 무엇이 갖고 싶었을까. 나는 그게 무엇이든 놓치는 게 무서웠다. 거기에 기회가 있는데 내가 모르는 채로 넘기는 듯한.
그래서 해가 떠있을 때엔 보고, 해가 지면 쉬고. 떠 있을 때엔 쉬는 새가 없이 걸었다. 빵을 사먹고 걷고 또 걷고.
걷고, 걷고, 또 걷고, 걷고, 걷고.
그렇게 양 발의 새끼 발가락과 신발이 스치는 부분에 물집이 잡히고, 그걸 터뜨리고, 집에서 가져온 듀오덤을 디자인해 붙이면서.
나는 무엇을 좇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무엇을 볼 수 있는 사람인지도 물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물었다.
나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나는 이대로 실패자로 사는 걸까?
혹은 이대로 실패자가 되는 걸까?
나는 그래도 괜찮을까?
그러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이걸로 뭐가 되든 안되든, 당장 오늘에 찍는 사진이 괜찮아지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벽과 햇빛만 남는다면? 혹시 내가 좇는 게 그런 이미지인 건 아닐까?
또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는 계속 중첩된 어떤 이미지가 잡힐 때마다 나는 그런 걸 좋아하는구나, 라고 알게되었다. 그러다 내가 찍은 사진이 너무 많아서, 너무 너무 많아서, 다시 보다가 졸 정도로 많아서. 내가 찍은 사진이 너무 많아서.
다시 내가 무엇이 두려웠는지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못보는 사람인 그 자체가 두렵다. 아무거나 보는 건 아무 것도 못보는 일보다는 낫다. 그렇게 나는 두려움 때문에 소스라치면서 아무거나 찍어댔다. 꽤 멀게 느꼈던 zf의 셔터가 이번 여행에서 그 코팅이 벗겨졌다. 많이 찍었나봐.
그러다 어느 순간에 한쪽 눈을 감았다. 두 눈은 헷갈리게 한다. 외눈으로 본 세상은 카메라 뷰파인더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내가 40미리 렌즈의 화각을 학습했다. 이제 어느 위치에서 볼지를 렌즈 없이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진기를 켜지 않고 외눈으로 내가 순간 찍고싶은 마음이 든 걸 본다. 그리고 그러고도 마음에 들면, 찍는다. 찍는다. 나는 왜 찍는 행위에 집착하는 걸까?
걷고, 찍고. 걷고 찍고. 걷고찍고. 찍고.
찍는다는 건 무엇인가?
내게 무엇인가.
일로써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일로써 내게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수 있을까?
내 사진이 괜찮은 사진일까?
찍을 때면 생각한다.
내가 혹시 사진으로 명성을 얻고 싶어하나? 포춘을 얻고 싶어하나?
그럴 수도 있겠지, 라는 마음 내핵의 어떤 위치에 가닿는다.
내핵에는 그런 욕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내핵에 있을 수도 있는 욕망이다. 실제의 욕망은 아닌 듯하다.
사진은 내게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잘하는 무엇이었으며, 언제나 도망갈 수 있는 무엇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림일 수도 있었고 춤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쩌다 내겐 사진인 것 뿐이다.
내 안에서는 그렇다, 그렇지만 생존하기 위한 나의 수단으로서는 과연 경쟁력이 있는가>
즉, 지금 답보한 문제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제일 잘하는 이것이 과연 세상에서 쓸모있게 생각하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의 안녕을 위해 내가 만든 사진이 기여할 수 있는가
혁신의 레벨이 낮은 일에 대해 내가 만족할 수 있는가 (나는 혁신이란 관념이 좋아서 스타트업 씬에서 십여년 정도 일을 했다)
반복과 반복의 세계에서, 나는 사진에 안질릴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마치 시험같다.
너 이걸 견딜 수 있겠니? 라고 묻는.
내가 사진을 수단으로 여기는가 목적으로 지향하는가.
수단인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는 내가 실은 목적화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진에 대해서, 그래도 될까?
너무 작거나, 너무 큰 영역이다.
좀더 연구적일 수 있길 바라는지도.
몇장을 붙인다.
오늘의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