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4시 30분에 시작하는 아침작업. 연상작용은 직간접 소스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6월 사진수업 2일차의 반성 또는 회고.

오늘의 노트

어제의 노트라고 하는 게 나을까?

아침 7시에 쓴다. 작년 할머니 돌아가시면서 아침에 작업하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그 뒤로 내 인생이 말하자면 180도 뒤집히는 과정을 거치며 무어라 작업에 대해 어떻게 정리를 못했는데, 어쩌면 이번기회에 아침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도.

칭찬이 있다.

어제 수업준비 때문에 아침 4시 30분부터 작업시간을 썼는데, 무언가가 잘되고 기분이 좋았다. 어릴적 엄마 말마따가 하루가 길었다. 아침이 이르면 하루가 길다.

기분 좋음이 있다.

페이스 갤러리의 제임스 터렐 전에 가까이 지내며 아웅다웅하는 ㄱㅇㅎ 쌤과 함께 다녀왔다. (아웅다웅이라는 단어는 참 귀엽다. 아~웅, 다~웅. 작은 버전으로는 아옹다옹도 있다. 고양이들이 야옹대는 모양새다)

터렐의 공간은 마치 루이지 기리의 사진 세계처럼 공기가 먹먹하다. 터렐이 만든 빛의 잔영은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게 한다. 우주로 나아가던 그 시절의 아트는 이런 것일까. 그가 구현한 명도와 색조가 천천히 변화하는 벽의 설치작품들은 타조알에 빛을 들이댄 듯 하다가 비취색의 바닷가에 드론을 띄운 듯 하다가. 여러 머릿속 이미지들을 훑어낸다.

그 연상작용은 나를 반영한다. 나의 삶의 경험들. 사진은 나의 현실에서 물성으로서 직접 만든다면, 연상작용은 직간접 경험을 재료로한다. 어쨌든 그것도 자신이 본 소스만을 토대로 한다. 머리에 더 많은 소스가 있다면 더 많은 연상을 하겠지. 어디론가 가서 다른 땅을 밟고, 공기를 마시고, 보고, 만지고, 먹고, 듣고, 냄새를 맡으면서 내 머릿속 세계를 더 구체적으로 구축한다면, 그것은 그 다음 순간부터 즉시 해석의 재료로서 쓰인다. 소스로서, 전환된다.

반성이 있다.

작업에 대해.

내 사진을 며칠 째 들여다보지 않은 점. 내 사진이라 하면, 클라이언트가 나인 나의 사진.

수업에 대해.

위의 연상작용에 이어서. 내가 수업에서 줘야할 건 만드는 경험이었을까, 아니면 더 많은 사진작품의 노출이었을까. 더 많은 사진을 보면, 자신의 사진의 폭이 넓어지기는 한다. ‘이럴 수 있다’는 것은 용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은,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담는 경우도 꽤 있어서, 혹은 자극적 현실을 가진 사람의 이미지는 더욱 매워서, 그것들이 눈을 붙잡아 두기도 하여서, 때로는 충격적이라서, 그것을 연약한 눈에 줄 수가 없었다. 사진은 맵다. 단일 매체에 움직이지 않는 상에, 평면에 힘을 주려니, 그렇게 되기 쉽다.

수업에 있어서, 40분짜리 3회의 수업을 4개 반에서 진행한다는 특성인데, 그래서 기획과 촬영을 같이 가려고 했는데, 어쩌면 너무 어렵게 이도 저도 아닌 경험을 학생분들에게 드리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기술’수업을 해주세요, 라고 요하는 순간 내가 균형을 잃는지도 모르겠다. 기계적으로 찍는 요령… ‘왜’ 가 없이. ‘무엇’이 없이 주어진 ‘어떻게’는..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배우질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하면 무한히 슬프다.

지금의 수업은 사진 앨범을 만드는 과정이다. 사진앨범, 나만의 앨범을 하나 쥐고 있으면, 나중에 보면 기분이 좋은데, 그건 나만 그럴 수도 있다.

묵직한 나만의 사진, 내가 찍은 사진만 들어있는. 한 명이라도 그런 기분을 알게된다면 그게 성과일까. 그것이 이 모든 투자의 의의일까. 아니면 모두 ‘적당한 연습’을 하는 시간을 주는 게 좋았을까. 이를테면, 사진 그리드를 켜서~ 코너에 맞추고~ 자 찍으세요~ 그게 정답이에요~ 하는. 아니 그것은 정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생각을 하면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왜 이 생각까지 왔냐하면, 작년에 지도했던 수업에서 ‘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틀렸다’ 라고 서로에게 평가하던 성인들이 생각나서였다. ‘틀렸다’, ‘맞았다’ 라고 평가하는 식으로 사진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사진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결정’ 하므로서 최초의 작업물이 만들어지기에, 되려 맞고 틀림이 없이 ‘바라보는 도구’로서 아직 나이가 어린 학생분들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앞으로 몇 년동안… 아이들은 평가당하게 된다. 자라는 내내 ‘틀렸다’, ‘맞추기 위해’ 무진 애를 쓸 것이다. 숨 쉴 틈 정도는 줄 수도 있잖아.

그런데 내가 어려워 했던 건 뭐냐면, 120분의 만남으로 숨쉴틈을 가져갈만큼 사진에 대해 경험을 줄 수 있는가였다. 그러니까, 바이올린을 배울 때엔 2년 정도는 나는 암것도 몰라요~ 로 무한연습을 한다. 피아노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다룰 수 있기 위한 연습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120분이 아니다. 사진도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치기 위한 손가락이 셔터 하나에 몰려있을 뿐이다. 셔터 하나에. 그게 모든 오해를 만든다.

아주 쉽다는. 몇개의 트릭만 배우면, 그럭저럭 잘 찍을 수 있단.

찍는다는 단어가 너무 값싸다.

사진을 찍으면 뭐가 주어지는가?

사진기 셔터를 누르면, 화상이 생긴다. 화상이, 디지털로- 필름으로- 유제에 남는다. 유제. 인화지에 남는다. 인화지에 남은 수많은 사진들은 수십년동안 남는다. 그렇게 ‘사진’이라 하면, 현실이었던 어떤 광경을 인간이 눈이 보는 것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다시 볼 수 있게끔 꾸며놓은.. 것이다.

그림에 비해 만드는 데에 매우 손쉽고, 빠르다. 조각, 공예품에 비해서 극도로 투입되는 시간적 비용이 낮다. 노동의 형태가 다르다. 그래서 이 쉬운 ‘찍는다’는 행위의 저렴함은, 곧 사진의 가치처럼 여겨지는가 의심한다.

그러나, 사진에 남는 것이 곧 그 사진을 만든 사람의 눈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진의 손은 눈일 뿐이다.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낚아채는 손이 곧 사진찍는 사람의 눈.

그래서 눈을.. 눈을 떠야한다. 사진을 찍으려면 자기 눈을 [이용]해야 한다. 눈과 연결된 의사결정을 하는 민첩성을,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한편 눈은 더 섬세하게 현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내 앞에 펼쳐진 화면의 구성적 매력을 읽어야 하고, 잠시 겁을 내려놓아야 한다. 마치 be-bold같은 이야기인가? 그렇지만, 이러지 않고는, 대체 무슨 사진을 찍을 수 있단 말인가?

어려운 걸 쉽게, 쉬운 걸 어렵게 알려주는 나쁜 행동인걸까?

그럼 어떻게 쉽게 할 수 있는가?

그래, 사진을 즐길 수 있으려면, 자기 눈을 쓰는 혹은 우연에 몸을 맡기는 행위가 더 먼저일 수도 있다. 내가 어릴 때 그랬듯 그저 매일 많이 찍어서 보고 킬킬대는 게 필요하다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주고 받고.

그런데 놀랐던 점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이 사진에 나오는 일 자체를 터부시한다. 교실에서는. 혹은 요즘의 사회는. 경제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에 사진을 선물처럼 주었던가 웹사이트를 알려주었는데, 시청 공무원인 모군이 ‘초상권 괜찮나요?’ 라고 물었다. 대체로 내 사진에서는, 특히 공개된 사진에서는 누구인지 특정 또는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적어도 얼굴로 말미암아) 사진이 꾸며져 있으며 명예훼손을 위한 시각이 아니라 해석에 있어서.. 좀더 유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지금의 메가시티에서는 어디나 사람이 있다. 사진은 현실에 기반한다. 사람이 있다는 현실. 사람을 사진에 담으면 안된다. 식별되면 안된다, 라고 생각하면- 어디에나 사람이 있는 메가시티의 현실에서 사진은 어떻게 남겨지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자, 지금의 시대를 보는 패러다임이 하나 생겼다. 이 안녕한 시기, 아름다운 나무는 전에없이 더 크게 생장하고, 벌레도 나비도 더 많아지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녹음이 흘러드는 이 시대, 이 서울에서는..

그래, 이웃에 대한 믿음이 없달까. 아니, 이웃이 없달까. 아니, 내 가족 외에는 전부 남이랄까. 샤프니스 값을 많이 준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잠재적으로 누구나 자신을 해하고, 권리를 침해하고, 나를 이용하여 상업적으로 활용하할거란 믿음이 잔잔하게 깔려있는 시대에 사는 것만 같다.

이것은 그저 프레임 중 하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진관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또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 나의 친가와 외가의 분위기가 매우 다르단 점을 느꼈다. 삶의 지향, 방식, 관계를 쌓는 방향, 방법, 권력의 구조성, 전통의 형태, 내용, 우선순위, 금전적 감각. 그 둘만해도 그렇게 다른데 모두가 다르겠지. 그러나 이들은 환경 안에서 배양되는 움직임일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러니까 환경에 성향이란 변수가 곱해지거나 나눠져서(같은 얘기이다) 어떤 행동이 도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참 비슷하면서도 다르겠구나 싶다.

가끔 사진을 아주 많이 많이 많이 많이 자유롭게 찍던 내 학창시절이 그립다. 아주 많이 많이 많이 찍고 또 찍고 아주 많이 많이 많이 아쉬움이 없을만큼 찍고 또 찍고 또 또 또 또 또.

그게 나의 훈련이었으니..

어쩌면 수업도, ‘기획’기반이 아니라 일주일동안 300장정도 찍어오라고 하는 게 맞았는지도? (나는 1주일에 약 10-12롤을 찍었으므로, 3-400장 정도.) 아니다 이것은 정답이 아니다. 나의 경우엔 스스로 웹사이트를 만들고 내 사진을 매일 리뷰하고 생각했지만.. 수업으로 만나는 사람들 대다수는 아니다. 다시 보지 않을 사진을 많이 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진이 나아질 때에는,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다시 보았을 때”이고, 이 경험이 아주 많아졌을 때, 뇌랑 눈이 그제서야 연결된다. 의사결정 하는 뇌와, 받아들이는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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