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고
요즘 예기치 않은 야근이 잦았어서, 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 여유부리는 수준이 약간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사랑을 하려는 마음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살아있고, 대화하고, 마주보고, 함께 생각을 교환하고, 같은 편이 되거나, 함께 잠시라도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과 공동의 목표달성을 위해 공조하기. 기쁘고 안도하는 마음을 품고.
상대가 마음을 내게 열 거라고 믿고, 나는 마음을 열어놓으려고 한다 말이 조금 길더라도, 내가 상대를 생각하며 가다듬은 의견을 적는다. 말한다. 오해하지 않으리라 믿고. 오해한다면, 잠시 숨을 멈추고,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한다. 다시 다른 측면에서 얘기한다. 싸우지 않는다. 다투지도, 분노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불쾌하지도 않다. 즉, 괜찮을 거라고 여기며 산다. 나는 지금 이러하고, 이 평화감에 만족이 든다.
이 자체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불안함과도 다르다.
이것은 불완전 하므로 안정적이다. 엉성한 형태이나 변화의 가능성이 수용된, 깨어지거나 찢겨지는 성질이 아닌, 말랑거리고 쫄깃한 상태. 조금씩은 변화할 수 있으나, 나의 기본을 잃지는 않을.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의 시나리오의 총합은 결국 내일 삶의 내용 하나로 정리된다. 수많은 시나리오들 중에서 무엇을 택할지 고민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내일 수행하므로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이 가능하고, 선택에 따른 사건을 예상해보며 그들 중 무엇이 장기적으로 나와 맞을지를 고민하면 나쁜 선택을 덜하게 된다. 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는 그 무엇에 나처럼 달라붙어 있을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말한다. 반대로,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가는 결국 상대의 사고방식에 내 삶을 노출시키겠단 결정이다. 한편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쓰고 채워 내용물을 구축할지에 대한 고민은 삶의 운영방식이나 습관형성 연습방법의 실천과 같다.
전통적인 사진(AI가 아닌)의 촬영이라면 현실의 시간 위에서 이뤄진다. 나는 그 시간을 주로 길에서 썼다. 이 연습은 길을 보는 데에 능해진다. 머리에 수많은 길의 갈래가 생긴다. 주로 그 길은 버스가 옆에 다니고, 걸을 수 있는 곳들. 내가 접근 가능한 곳들. 나 같은 또다른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곳들. 여러 사람이 오가는 가운데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 우연성들을 순간적으로 보고 낚아채는 방식에 의지했다.
길, 특히 open-air road는 시간이 지나며 빛이 길었다, 짧아졌다, 그림자가 바뀐다. 여러 매터리얼을 통과하며 그림자는 투명해졌다가, 빛은 색을 입었다가, 그것들이 결국 떨어지는 곳은 길바닥 또는 벽면. 도시란 그렇다.
그런 도시의 숲의 초록은 도시의 벽돌과 대리석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무채성 위에서 생기를 조심스럽게 머금은 상태임을 들키지 않으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서울 중심부, 내가 사는 용산구, 중구, 마포구에서는 더이상 흙먼지가 날리지 않는다. 빌딩 사이사이로 빛이 적당하게 약속된 대로 떨어진다. 바뀌는 것은 사람들의 움직임 뿐이다. 우리는 고체들 사이에서 숨쉬는 생명체들. 이 모든 변화를 만들어놓고, 그 자연물 사이 인공물의 혁신 속으로 걸어들어가 숨과 스트레스를 내뿜과 마시며 사는 존재들.
며칠 전 올린 포토그래퍼스 플레이북 책을 한번씩 펼쳐 읽다가, 랜드스케이프와 스트리트 포토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논한 글에서 눈을 멈췄다. 그는 기다림이라 했다. 기다리면 랜드스케이프, 찍고 빠지면 길 스냅. 나는 약속된 인공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다린다. 인공물에, 자연, 우리가 아는 중 제일 거대 자연인 지구의 회전으로 빛이, 인공물을 뒤덮었던 빛이 그 빌딩과 저 빌딩 사이로 들어왔다가, 또 다음빌딩을 통과하지 못해 거대한 그림자를 땅에 떨군다.
그 그림자는 인간은 빌딩을 기준으로 개미와 다름없는 크기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빌딩의 관점에서 우리는 개미이다. 그럼 개미의 관점에서 개미인 건 무엇일까.
사진은, 관점을 자꾸 바꾸는 연습으로 이어진다. 남의 렌즈를 상상하고 그걸 나의 카메라 장착하여, 그 렌즈를 통해 본다고 여기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사진은, 사진을 계속 하다보면 사진기 없이도 상대를 그저 좀더 빤히 보거나, 듣기만 하여도 그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고, 애잔함을 갖기도 하며, 그저 그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주어 모아서 그의 눈을 쓰는 듯, 그가 서거나 앉아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들이, 여기가 어떻게 보일지를 상상하고, 그 인지되는 세상에서 그가 지금 저 말을 할 때엔 그의 작은 그머릿속에서 어떤 경험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을지, 아주 천천히 느끼려고 노력할 수 있으며 그 생각에 가닿을 수도 있다.
또는 그저 나와 대화하는 그 상대와 떨어진 30센터, 50센티, 1미터의 거리 사이에 아주 통이 큰 투명한 파이프가 보인다. 그 파이프를 통해서는 그의 존재 자체가 오고 간다. 말 뿐만 아니라 그의 진정한 생각, 그러니까 말이라는 겉면 아래에 있는 의도, 의지, 그 모든 꼬인 것들을, 그 모든 먼지들을, 그의 나쁜 습관을 다 털어내고 덜어내고 후후 불어내고 나면 남아있을 어떤 그 사람의 정수같은 게, 본체, 작은 구와 같은 그 마음, 그 연약함부터, 강해지고 싶음까지. 그런 것들과 직접적으로 만난다.
그 파이프, 나와 얼굴을 마주한 사람의 진심이 설명되지는 않으나 표현 아래의 어떤 마음이 오간다는 그 파이프란, 사실 카메라 뷰파인더로 세상을 보던 연습이 체화되어 생긴 그야말로 터널현상일 수도 있다.
점차 나는 나를 다루는 방법이 다양해진다. 수영으로는 나를 물총오징어처럼 움직이게 한다. 슈웅, 하고 뚫고 간다, 주변의 무게와 저항을 이용한다. 나아가리라, 힘들이지 않고 대신, 부드럽게, 물분자의 정체되지 않은 움직임 사이에 내가 손끝을 밀어넣고 내 무게중심을 옮겨 그 모든 저항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조금씩, 조금씩.
피아노로는 이 음에서 저 음으로 연결하며 달콤한 마음을 느끼고, 다음 음에서 다다음으로 갈 때엔 곧 낙담함을 받아들인다. 피아노 연습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안전하게, 태운다. 아침에 그 몇번의 회전이면 달달하고 씁쓸한 삶의 면면을 경험한다. 외로울 수도 있고, 환희에 차서 떠들기도 하는 그 음들은 언제나 악보집 안에 있었는데, 내가 이제야 알았다. 거기엔 글로 적히지는 않은, 어느 마음들이 보관되어 있다. 마음의 변화가 보관되어 있다. 글은, 아니 정확히 단어는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면, 피아노를 치며 들리는 소리에선, 마음의 흐름이, 그 흐름은 축약되기도 하고 때론 늘어지기도 하며, 여기에서 저기로 흐르고 또 코너를 돌아 유턴하기도 하는, 춤사위같기도 한, 그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에는 그런 힘이 있다. 사진연습으로는, 상대를 이해하기도 전에 존재의 현신 그 자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과 감동을 느끼게 하는, 이 시간과 저 시간 사이의 변화를 알아채게 하는, 그로서 살아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시간을 산다는 자각과 그에 따른 눈 앞의 모든 현상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오늘의 사진
빛의 거리




엉성한 세상







공사장 파랑



남산 5월 2025년




초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