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고
혹실드의 <가족은 잘 지내나요?> (교보링크)를 읽다가 요즘의 사진관 운영에서 느끼는 모순성을 그대로 발견한 부분이 있어서 생각을 갈무리 해놓는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혹은 NPC.
가족사진을 찍을 때에 기이한 느낌이 드는데, 그 공간에서 나는 유령 같다는 점이다. 내게 찍히는 사람들 간의 유대관계를 찍기 위해 빌려놓은 사람처럼 스스로가 느껴졌다.
가장 최근에는. 뭐랄까, ‘그냥 찍기나 하지 별걸 다 묻네’ 라는 느낌을 받았달까. 사진찍는 NPC 같았다.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고, 상대를 직기 위해 상대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끈을 던져볼 수가 없던 경험이었다. 안 던지는 게 안전하겠다는 판단이 서는.
사진을 찍기 전후로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어떻게 찍고 싶은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걸 갖고 들어오는 건 내게 주어지지 않을 기회처럼 느껴졌달까.
그럴 수 있다.
사회심리학적으로 해석하기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하다가, 혹실드의 글 감정규칙에 대한 언급이 실마리가 되었다.
우리는 마트 계산원에게는 감정을 쉽게 분리할 수 있는 반면, 깊은 애정을 가진 자신의 배우자나 부모, 아이들에게는 그 규칙을 적용할 수 없다. 우리 감정은 생활하는 와중에 NPC같은 감정노동자에게는 ‘너무 적게’ 이입하고, 가족에게는 ‘너무 많이 개입’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사진관은 그런 ‘많은 감정의 개입’이 있는 가족관계를 완전 처음봐서 ‘개입수준이 매우 낮은’ 낯선 사람이 찍는 구조이다.
그러니까 임시이더라도 관계가 ‘쌓일’, 어떤 표정을 열고 마음이 열릴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의 ‘가족사진’을 후딱 찍고 가는 상황에서는, 이런 만남의 접점이 너무 약하다.
연결성을 담기는 커녕 그를 연기할 배경의 연습 조차도 없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이 와서 있는 그대로 보여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건가?
진짜 문제: 나는 어느정도 상호공조성이 있는 작업이기를 바라지만, 상대는 나의 의도를 모르므로, 틱틱 사진찍는 기술자로 여긴다. 후자의 정체성은 나에게 절망적이다. 이 모든 고생의 의미가 없다.
아니.. 어쩌면 문제는 ‘내가’, 나라는 자아가 이런식으로 작업하는 건 전혀, 재미없다는 부분이다.
나는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연결되지도 않고, 대화도 없고, 그냥 소란과 분란이 안나기를 바라며 말없이 사진기 들고 포즈 조정해주고 적당히 조명 쳐서 찍어주려고 있는 NPC가 아니고 싶은 듯하다.
나는 연결이 되고 싶어서, (깊은 수준이 아니라 작업의 범주 안에서, 그러나 사람의 얼굴과 몸을 옮겨 담는 이 일에서, 감정분리를 하고 싶지 않다) 이 공간을 열었다. 그런데 최근 불안하고 불만족한데에는 아마 이런 시장이 기대하는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고 적당히 잘 찍고 무난하게 결과를 내주는 사진관 운영자’라는 정체성과 나라는 사람이 가진 ‘상대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만들어가고 싶은 생각’ 이 두가지가 상충하고 있고 그 사이에서 많은 고민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렇게 된 배경?
그런데 단방향에서만의 반응은 아니다. 나 역시 2월 말에 나에게 말로 돌을 던진 어느 남자(포스트 링크) 이후로, 사진관에 오는 사람들에게 이 ‘감정분리’를 인지적인 수준과 그 하위 범주에서 까지 시행했던 것 같다. 그 남자가 그렇게 무서운 말을 던진 걸 정면으로 받은 이후로 사실 사람들이 무섭다.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질문을 더 못하게 되고, 조심하는 게 심해졌다. 더 벽을 치게 되고, 방어를 보인다.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질문을 하지도 못하고, 덜덜 떠는 건 내가 아닌가.
가격을 높여서 기대치를 조정하는 것과, 내가 제공하고 싶은 서비스의 형태와, 시장이 기대하는 ‘전형성’과 그에 따른 거리감 조절. 주변의 ‘장사는 그렇게 하면 안되지’라는 어떤 통상적인 것. 나 역시 작가로서 사람들을 만나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점을 분명히 할지, 아니면 저렴한 가격대에 이거저거 적당히 퍼주며 장사하는 사람이 될지.. 고민을 미룬다.
아니, 연결감에 대해 고민하는 지금이 그 고민의 일환이긴 하지만, 이런 진실들을 마주한 뒤에 자기반성을 하듯 지난 한두달을 살펴보면 그 전과는 달리 내가 뭔가 변했다, 혹은 방어적이 되었다는 걸, 항상 피곤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전에도 피곤했지만, 그 남자손님 이후로 피상적이기를 선택했던 것 같다. 피상적이고, 관찰하지 않고, 대신 관념적으로 적당한 수준을.. 그렇게 마주하려는 노력을 일부러 꺼놓은 듯한 느낌.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까?
음.. 미로를 돌고 있는 건가?
더듬더듬 견디면서 돌파구를 만들어야하나.
스스로 정체성은 정의하기 나름일텐데, 내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고, ‘적당함’, ‘문제가 안생기는 범주’ 이런 쪽으로 향하려는 게 스스로의 가능성을 죽이는 선택이라는 생각은 든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로 얻어맞는 수모를 당한 뒤에, 나를 그렇다면 어떻게 지킬 지에 대해서 대책이 없는 상태로 계속 운영하는 자체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끔 만든 건 아닌가. 내가 안전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과 연결감과 공감대의 형성을 어느정도 해가면서 사진 작업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처럼 도착하자마자 인사하고,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옷을 걸고, 거울 보고, 아 안녕하세요… 하고 틱 틱 찍는 건 재미없다, 이거 아니야, 이거 아니야. 이러려고 이렇게 연 게 아니야.
나는 뭘 원한다고?
주도권을 갖고 통제하려는 그런 욕구가 아니라, ‘같이 만들어가는 사진’이라는 걸 하고 싶다. 나는 그사람들이 궁금하다. 그사람들이 행복함이 드러나는 사진을 원한다면 ‘행복감’ 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지도 궁금하다. 그 사람들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한피스씩의 초코렛처럼 꺼내서 우물대듯 흘려달라고 요청하는 동안 나오는 그 표정, 어떤 그들이 감정적으로 또한 감각적으로 과거의 좋은 때를 잠시 헤집어 말로 바꾸어 내려놓는 동안 달라지는 그 분위기가 나는 필요하다. 필요하다. 좋은 사진이 나오려면.
그러니까.. 나는 포즈 제너레이터가 아니다. 나는 여기서 최선의 조명을 디자인해서 치고 싶지도 않다. 여기서 기술은 적당한 수준이고자 한다. 기술이 중심이 아니다. 여기는 상대의 삶이 여기에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 삶, 그들의 삶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적 교차가 주는 의미의 관점에서 사진을 달리 보고 싶다. 단번에 무엇을 발굴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듣고 생각해서 좀더 내 속도감에 맞도록 작업하고 싶다…
찍는 사람은 찍힐 사람이 누구인지, 왜 찍으려고 하는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 그런 게 궁금하다. 아는 만큼 달라질 수 있다 사진이.. 그리고 나의 방향과 상대의 특성이 만날 때에 이미지가 고유해진다.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
사진은 지난 1월의 눈온 날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