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음악
4년 전 Black Pumas의 (위로) 공연, 벌써 코로나 시절이 이렇게나 오래되었다니?
에릭 버튼의 몸짓에서 씽씽의 이희문을 본다.
어쩐지 둘이 바이브가 비슷해? 안경 때문만이 아니라.
내친김에 씽씽도.
오늘의 사진
토요일 도서관에 가던 길 교내 꽃밭. 모바일 라이트룸으로 만진거라 색이 튈 수도.


오늘의 소고
책상 위에 있는 파이(포토카드가 있다)가 나를 보고(사진 속 파이가 렌즈를 보고 있기 때문에, 곧 나를 향한다) 묻는다. 그래서 뭐 하려고? 뭘 할 건데?
아니 뭐 거창한 건 아닌데.
라고 하면서도, 이제 깨달은 게 하나 있지. 파이야 들어봐.
…
여기까지 쓰고 레몬즙 내서 뜨거운 물에 섞어 마시려고 부엌엘 나갔다가, 파이 이름이 크게 쓰여져있는 유리 소재의 파이 밥그릇을 실수로 깼다.
우연이지만 내 멋대로 받아들이기로.
‘응 나 여기 있어, 앞으로도 부르면 곁에 있을 거야’ 라거나,
또는 ‘딴 짓 하지 말고 가서 하고 있었던 그 해야할 일을 해’ 라는 의미로.
나간 김에 일은 조금 커져서 야채를 끓여 자기전에 마실 채수를 냈고, 반죽해놓은 빵을 성형도 했다.
한 눈 파는 건 참 쉽지.
…
돌아와서, 음악도 끄고, 조명만 켜놓고, 옆에 마실물도 다 갖다 놓고.
다시 앉아서 오늘, 어제 머릿속에 맴맴 돌던 생각을 옮겨적어본다.
…
두서는 없다, 생각도 각각 아직 이어지지 않고, 조각조각이다.
…
조각조각의 생각들
설국열차의 환경을 상상해보자.
나는 주어진 트랙 위에 내 기차칸을 올려놓고 어떤 힘에 의해, 혹은 범용적인 그 트랙의 특수성에 의해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움직일 수 있었다. 운송이 업이라면 운송을 하는 기능을 무난히 수행하며 움직였다고 해보자.
그런데 어느날 그 트랙은 나라는 열차가 아니더라도 다른 차도 얼마든지 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얼음조각과 눈 아래에 묻힌 내 트랙을 파내는 상황이다. 나만 탈 수 있는 그 트랙.
그 트랙은 내가 이미 지나왔던 저 예전의 트랙인데, 끊겼었다. 혹은 이탈했다. 끊긴 선로, 혹은 사용되지 않는 선로는 죽는다. 관리되지 않아서, 기상의 변화에 노출되었고, 눈 아래에 묻혔다.
나는 나라는 차를 범용트랙, 운영이 어느정도 보장되고 예측가능성이 있는, 나의 맞춤형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내가 맞춰서라도 탈 수 있는, 그 기찻길에 올려서 움직였다.
근데 모두가 탈 수 있는 그 트랙은 사실 내가 타기에는, 스스로의 너비를 스트레치 하며 꽤 애를 많이 써야 했던 길이고, 가는 길에서 보는 광경이 재미가 크게 없었고, 목적지도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행선지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어쩐지 가고 싶지 않은. 밋밋했다.
그래서 예전에 옮겨타며 내버려 두었던, 내 맞춤형 트랙으로 다시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맞춤형 트랙은 나만 탈 수 있고, 나에게 꼭 맞는다, 그런데 좀 굴곡이 있고, 어쩐지 빙빙 돌기도 하고, 업다운도 있고, 자그마하고, 꼬불꼬불하기도 하고, 아주 작은 산악열차랄까. 광산 안쪽을 달리는 작은 달달이 같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 트랙을 달리는 게 내 열차의 바퀴를 운용하는 데에는 애를 쓸 필요도 없이 편하지, 라며 행동으로 옮기려고 보니, 너무 오래 돌보지 않아서 그 길이 저 눈의 더께 아래, 두께있는 얼음 아래로 파묻혔다.
저 트랙을 타면 내가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걸 안다, 나만이 탈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내가 *내버려 둔 탓에* 저 아래에 파묻혔어. 그걸, 타려면 깨야한다. 그리고 한칸씩 느리게라도 전진할 수 밖에 없다. 근데 나만 탈 수 있고, 나는 거기서 편할 것이다. 수고스러운데 편하다니?
하지만 그럴 수 있다. ‘환경은 어려우나 그 트랙 자체는 반드시 내게 맞는다’는 주변 컨디션의 불안전성 가운데에 핏에 대한 확실성이 있다. 그렇다면 탈래?
아니면 범용라인을 타고, 어쩐지 내 옷은 아닌 것 같은, 그 품에 나를 맞출래? 근데 그 품이 영 낙낙하거나 영 작거나해서, 폼이 안나, 그 라인은 누군가에게는 최고인데, 그렇다고 내게도 멋진 비단옷은 아니야.
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쇄빙도구를 앞코에 탑재하고, 한 칸을 나아가려고 한 칸 어치를 발굴한다.
그런 느낌인 거 같다. 그 트랙 시작점에 타보기려도 하려구.
여러 프로젝트들의 숨겨진 메시지
갑자기 프로젝트 아이디어가 툭 나온다.
또는 지금 진행하고 있는 (하려고 애를 쓰는) 산발적인 프로젝트들이 있다.
그 구현 형태는 사뭇 다르다.
비슷할 수 있는데, 운영하려고 보면 축이 딱 맞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걸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게 산발적이라고 보인다.
일관성이 뭔지 잘 안보인다.
모녀사진과, 비정형 식구사진, 개인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헤드샷은 인상사진이라는 카테고리만 같을 뿐이다.
게다가 사진엽서라든가, 사진엽서의 내용물은 예전에 찍었다는 도시, 자연, 사람의 모습이고. 엽서를 한다는 건 또 뭐 메시지를 등에 태우고 왔다갔다 하는 액션이 뭔가 ‘찌잉’ 해서라나.
거기다가 사진교육인지 사진교실인지는 자기 눈을 관찰하는 접근법, 자기 앞에 놓인 걸 지그시 들여다보고 애정을 갖거나 감동하는 과정에 대한 거라니.
그리고 왜 다 사진이야?
라고도 할 수 있고.
거기다가 돈 안된다는 사진관 운영까지?
겉으로 보면 이 맥락이 없이 이것저것 같은, 콘텐츠들이다.
그런데, 어느순간에,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는 이해를 했다.
연결되어 있는 레벨이, 층위가 겉이 아니다.
노드가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위에서 보거나 어느 프로젝트로 부터 시선을 두면 안되고, 이 모든 프로젝트를 생각하고, 운영하는 나로부터 봐야한다.
그러면 연결이 된다.
내가 모르는 건, 알아내야 하는 건, 나는 [왜] 각각의 프로젝트를 생각해냈는지랑, (왜 해야만 하는지라고 느꼈는지) 그리고 그들 간의 중첩성이다. 그 이유의 지각에서 멘틀로, 외핵에서 내핵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정수를 찾아야 하는 차례이다. 저것들을 운영하는 기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저 모든 산출예정물의 함의, 그 정수가, 에센스가, 그 질문이, 그 본질이, 내게 있다.
그 질문이, 그 메시지가 무엇이냐?
‘안다고’ 생각하지만, 말로 쓸 수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단 하나인데, 그것들이 저렇게 다른 얼굴로, 형태로, 기획 아이디어로 나왔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메시지는 단 하나이다. 아주 근간에 있는 것.
그것을 [말로] [글로] 캐내야 한다.
캐낸다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밀고 나갈 수 있다.
그것이 내 트랙의 시작점이다.
쇄빙의 목적, 지금 쫓아야 할 목표는 그것이다.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이 활동을 통해 돌아보고, 반사하고, 비추어 보건데, 나는 이 속 안에서부터 끌어올려서, 내 시간을 전부다 써서, 가진 자산을 모두 바쳐서, 내 지적 능력을 고도로 집중해서, 내가 자신없는 부분까지도 탈탈 털어서, 그 못난 부분까지도 보아가면서, 나의 늘어지고 싶은 마음을 이겨가면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그 얘기를 하기 위해 저것들을 한다는 게 타당한지는, 혹은 ‘어떻게 구현해야 그 얘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데에 효과적’일지는, 나의 그 질문을, 신념체계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그 때서야 알 수 있다.
..
내 시간과 지력을 바쳐서 풀어낼 무엇을-왜-어떻게의 구체화가 지금의 숙제이다.
여러 프로젝트(‘무엇2’)의 구체적 디벨롭(‘어떻게 할거야?’)에 앞서, 내 숨겨진 신념체계(‘무엇1’ )를 깨달아야 하고, 그것의 간결한 메시지화 (‘왜’)를 선행적으로 하자.
그 트랙이 나라는 열차칸 외에 다른 차가 못타는 트랙인 이유는
행선지가, 혹은 그 트랙이 지나는 길이 곧 나의 내면이라서 그렇다.
나라는 육체와 정신을 갖고 지난 고유의 시간을 거친 자의 내면세계의 신념체계를 훑어내고 그것을 통해, 지도인 동시에 원동력으로 삼아 어디론가로 향한다.
그 목표지점이나 최종 행선지의 형태, 내용은 아직 잘 모르겠다, 앞의 작업을 하면서 나도 내 욕망, 열망, 지향의 실체를 알게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