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진








오늘의 노트
(취)약점을 왜 드러내?
내 어릴 적 얘기를 공개된 곳에 쓰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누군가 나의 그 시절 이야기를 통해 나를 알게 된다면, 그 경험 때문에 나를 얕볼 수도 있을까? 그럴 수 있겠다. 본능이니까. 나도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걸 일기장이 아니라 공개된 곳에 쓰는가? 이 작업은 궁극적으로 나를 이해하려고 진행한다. 또 나 혼자 보는 글이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읽을 수 있는 곳에 그래, 지나간 시간에서 그랬던 적이 있었고, 지금은 아니다. 라고 썼더니, 내가 오늘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나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위로, 위로, 뻗어나온 가지이다. 연약한 몸과 마음을 들여 환경에 맞서기보다 수용하고 적응했다. 그 뿌리는 어쩔 수 없이 오늘 내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반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그 뿐이다. 내 초기에 상처가 있었다고 해서, 오늘이 마냥 엉망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덕분에 나는 오늘 숨 쉬는 것이 행운이라 느끼고, 외부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 작은 친절에도 쉽게 감사하며, 스스로 삶을 꾸려낼 기회를 어린 때부터 가졌고, 그에 따라 내가 갖춘 수준에 대해 내면적 만족도가 높다. 만족은 곧 행복을 구성하는 단서이다. 따라서 나는 좀더 쉽게 행복하다.
내면의 염증과 함께 지금도 적당히 살아가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과한 반응도, 부족한 대우도 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장의 고통 앞에서는 신음하지만, 지나가면 내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걸 안다. 필요하면 피로감과 일을 맞바꾸기도 한다. 약간의 노력을 들인다면 어느정도의 부조리와 불합리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을 이루는 사람들의 심리를 큰 편견이나 판단 없이 그저 받아들일 수도 있다. 현재의 나는 나는 아프지도, 크게 무기력하지도 않다. 오래 훈련한 눈과 마음 덕에, 호기심과 경이로움을 느끼며 사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으로 나는 누군가 제 입맛대로 다루기에는 제법 까다로운 사람이다. 말이 가지는 힘을 크게 느껴서 쉽게 불평하지 않고, 긴 호흡에서는 낙관적이지만, 순간적으로는 겁이 많아 내 영역을 넓히는 데 시간이 걸린다. 소위 예민한 사람이다. 마음이나 속이 불편한 음식은 먹지 않고, 불쾌한 사람은 만나지 않으며, 불안한 자리는 가지 않는다.
다만, 불편한지, 불쾌한지, 불안한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경험 해보려는 정도의 모험심은 있다.
그렇게 나는 입체적이다. 그렇지만 완벽한 구의 형태는 아니다. 성장과 생활 중에 환경과의 마찰로 인해 깨진 부분이 있다. 그 깨진 부분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고,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파악하며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재미를 주었다. 나는 꽤 묵묵하게 견디는 힘만큼이나 “아프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유약함도 있다.
나는아장아장 대거나 성큼성큼 걷는 그 두가지 모두 가능하다. 이 사실을 스스로 안다.
취약점을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나는 좀더 스스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모습을 지키면서도 세상과 어울려 살기 위한 처치로서, 더 나은 삶을 능동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땅을 다지는 것과 같다.
내가 다루려는 문제와 질문은 어떤 성질인가?
이것은 특정 상황이나 트리거 가 눌렸을 때 발현된다. 내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좀더 쉽게 염증처럼 올라온다. 거스러미 같다.
푹 하고 잇몸에 박힌 고등어 가시처럼, 크게 넘어진 뒤로 뻐근한 고관절 인대처럼, 잘못 쓴 어깨가 낳은 만성적인 통증처럼, 손톱 아래에 박힌 4B 연필의 흑심처럼. 어린시절 거기에 박혀 제대로 제거하거나 해소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 자연히 봉합되었다.
지금의 이 자유와 시간을 들여 지금 내가 하려는 건 오래된 내면의 염증에 햇빛을 쬐는 작업이다. 안녕한 때에 갖고 놀 수 있는 퍼즐이다. 어린 시절에 주어진 숙제를 오래 가지고 있다가, 어느정도 능력이 갖춰진 시점에 들여다볼 뿐이다. 어떤 난제들은 기다려야만 풀린다. 연결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퍼즐과 단서 모두 내면에 있기 때문에 해법을 찾으려면 필연적으로 상처를 벌려야 했기에 지금까지 외면했지만 이제 미루고 싶지 않은 때가 왔다. 나는 육체적으로 이 한번 뿐인 삶의 중턱 전에 와있다. 저 언덕을 지나가기 전에, 저 언덕을 오르기 전에 채비를 한다.
그저 나로서 살아있는 채로, 스스로라는 존재의 무게와 다면성을 충분히 느끼고 음미하며 그저 그로서 괜찮은 채, 극복해가며 즐겁게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결해야 할까? 다루기에 더 직관적이려면 내 안쪽에서 꽈지고 비틀어진 여러 요소 중 어떤 선을 먼저 풀어봐야 할까? 배선을 바꿔야 할까? 아니면 그저 선을 정리만 하면 되는 걸까?
이 문제를 풀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내가 나를 애틋하게 대하고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렇담 나를 둘러싼 세상의 평화와 내 주변의 안녕에도 기여할 수 있다. 꼬인 배선이 굳어 딱딱한 석회가 되기 전, 이 부드럽고 여린 때에 시간을 내어 상처를 소독하고 다독일 수 있어서 다행이 아닌가?
…
내가 가족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이유, 모녀사진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배경, 오늘 사진으로 어린이 때에 가족과 탈법한 오리 배를 선택하게된 나의 결핍. 그것들을 그저 부끄러워하고 모른체 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내가 지금부터 던지려는 질문은, 그동안 내가 배고파했고 먹고 싶어 했는데, 그렇다고 말할 수 없던 무엇들에 대한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