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빛나는 햇빛 (52): 2019년 스위스 남부. / 사진교실, 표현과 기술수업 요구 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

·

먼저 후보정에서 햇빛이 잘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여유가 생겼을 때 보면 좋겠다.


지난 몇주동안 사진수업 봉사 하면서 50대로 추정되는 여성 참여자로부터 표현교육이 어렵다며, 기술을 가르쳐주지도 않고 어떻게 하냐며 기술교육이나 기초부터 해달라고 요구를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이번주를 지나며 이게 나에게 꽤 스트레스가 되었다. 작년에도 50대 중후반인 남성분께서 비슷한 얘기를 하신적이 있다. 이 때 사진이라고 하면 곧 기술이 있으면 생산할 수 있는 시각매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단 인상을 받았고, 그리고 사진교육을 곧 기술교육이라고 오해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 사진을 통한 표현을 얘기하면 예술 그런건 됐고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지 않고), 기술을 알려달라고 하신다.

나는 이러한 요구를 곱씹을 때에 불편한 마음이 크게 들었다. 왤까, 나는 왜 그런 요구가 부당하다고.. 아니 단어가 정확하지 않다, 좀더 정확히는, 그 요구가 함의하는 어떤 욕망이 보였고, 그것이 매우 안쓰럽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유한 ‘표현’을 욕망하기보다 누군가 이미 정립해놓은 ‘기술’을 우선 배우고자 한다는 게, 내게는 곧 정답과 획일성, 효율성을 좇는 우리 사회 문화 같아서였다. 깊이 없이 기술적 지식을 배우더라도, 어떤 ‘표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집단성’, 그 지식의 ‘이데올로기’에 산입되면, 맞은 것과 틀린 것의 레이블을 붙이고, 정량적 평가가 가능하며, 그 갯수를 세어 성적의 줄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이기고, 내가 너에게 지고… 이게 가능하다. 점수로 수준을 매기거나, 잘함/못함과 같은 이분법적 평가, 즉 그 안에 해석이 없는 디테일이 빠진 평가할 수 있다. 내용을 읽기도 전에 북커버, 아니 편집디자인, 아니 폰트의 타입페이스로 글을 평가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나는 그게 싫다. 그런 집착을 해야할 산업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개인이 처음 배울 때에는 그렇게 틀짓기부터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건 가능성을 제약하기에 쉬운 함정이다.

대학을 1년 정도 다닌 다음에 방학 중 인도에 다녀와 60롤이 넘는 사진을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었다. 자기가 사진을 좀 한다며 크리틱을 할 게 있다고 음성채팅을 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 내가 어느학교 어디과에 다닌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어설픈 코멘트를 종합해보자면, 내 사진이 ‘선’이 안맞는다며, ‘흔들렸다’며, ‘초점이 안맞는다’며, ‘틀렸다’고 했다. 앞에는 그냥 그의 어설픈 감상법의 표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틀렸다고? 뭐에 대해 어떻게 틀릴 수가 있지? 다시 한번 보자, 어떤 직각이 아닌 선, 어떤 흔들림, 어떤 흐림.. 이것들이 무엇에 대해 틀릴 수 있을까? 그건 그의 관념을 기준으로 한다. ‘그래야 한다’는 관념,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외의 선택을 ‘오답’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 관념을 자신에 들이대는 것과 다른 사람의 작업에 대해 들이대는 것, 이는 같은 일이 아니다. 자신의 관념을 자신의 관찰로 따르고 맞춰가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자신의 관념으로 다른 사람의 삶의 모습과 그 흔적을 표현하며 생성한 이미지에 대해 ‘감상’이나 ‘해석’없이 그저 어떤 일련의 법칙성에 기반해 재단하는 것은 무성의한 일이고 오만이며 월권이다. 그 때 내가 이 질문을 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느껴지는 감정이나 느낌은 무엇인가요? 제가 이걸 찍거나 선택한 이유는 혹시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뭘 주의깊게 보여주고 싶어했을까요? 저는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보시는지가 궁금하네요”

근데 요즘 내가 이 얘기를 하게된다. 언제하느냐면, 수강생 분이 ‘내가 이런 사진을 찍었는데, 어때요? 저는 이 선이 좀 휜 것 같은데, 이걸 똑바로 찍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라고 할 때, 기술적 평가와 개선방법을 응답을 요구하실 때 내가 버티질 못하는 것이다. ‘저는 기술적인 부분을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하거나, ‘휜 게 왜 중요하죠?’라고 되물은 다음에 이어지는 ‘기술’에 대한 대화 속에서 도망가는 문을 아직 못찾는다. 그러다보면 그에게 말린다, 그리고 내 속에 남아있는 미술, 디자인, 사진 교과를 통해 배웠던 어떤 기존의 ‘정석’을 회상하여 답변에 들어가곤 한다. 그리고 그 멘트가 끝나고 나면, 아차싶다. 아니 아차 그 이상이다. 나의 선택이 오판이었다. 몇번이고 입을 다물고 모르겠다거나, 이르다고 간단히 자르고 되묻기를 하려고 이미 나는 생각했었다. 즉 ‘찍으신 수강생 분께서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셨나요? 여기서 주인공으로 두신 건 무엇이죠? 그걸 잘 나타나도록 하셨던 걸까요? 스스로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라고 그에게 칼자루를 쥐어주고,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하려고 연습했다. 하지만 나는 ‘기존의 교육이 내게 남긴 기술정보에 의한 판별’ 즉, 상대는 평가로 받아들일만한 코멘트를 말하고야만 것이다. 그래서 나의 선택을, 오판을, 순수하게 아직 덜 훈련되고 여문 나의 반응을 후회한다. 아직 상대가 기술에 대한 정보를 알면 안되는 때라고 생각하며, 또 좀더 표현의 영역에서 시간을 끌어가며 경험하도록 도와드리고 싶은데, 왜 나는 그 유도에 넘어가 나도 싫어하는 ‘평가질’을 거기서 하고 있느냔 말이다.

표현을 할 줄 모르거나 읽을 줄 모를 때에는, 이게 투사에 의한 것인지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 이런 정보를 스스로 판독해보고 해석하고 감상하는 그 일련의 느끼는 과정이 생략되거나 다다르기 전단계에 기술정보가 들어가면, 곧잘 우리는 굳는다. 그 말랑말랑하던 표현이 어디 통에서 굳어버린 젤리나 아이스크림처럼 변한다. 그 변한 모습을 다시 고유한 것으로 치환하려면 또 그만큼의 집중연습이 필요하다…. 참 이건 잘 찍은 사진, 이것 못 찍은 사진으로 판가름하기 좋은 도구이다. 나는 그게 정말 싫다. 나는 그래서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와 집착을 마주할 때면 불편하다.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받은 인상이 있다 참여자들은 다른 사람이 만든 이미지를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반면, 자신이 만든 것을 포함해 이미지의 구성을 해석하여 언어적/비언어적/암시적/직접적 의도를 추출하거나, 혹은 자신이 관람을 통해 받은 느낌을 직접 말하는 것은 불편하게 여긴다.

만약 이런 사고의 패턴을 가진 사람들이 ‘기술’, 그러니까 ‘정답’으로 인식할만한 정보를 안다면, 아마 손쉽게 평가할 수 있어서 기술을 좇는 것은 아닐까? ‘기술적’으로 이렇게 배웠는데, 그 틀에 안맞으니까 이건 ‘틀렸어’ 라고. 그렇게 보자면 학습으로서의 기술은 표현보다 손쉽다, 남이 만들어놓은 정보를 정답으로 인식하면, 그거 말곤 다 틀린거라 선택의 고통을 줄여준다. 1 또는 0의 세계이다. 그래서 생각 안해도 된다. 그러나 각자 고유의 표현으로 가면 0과 1 사이를 메꾸는, 깊이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스케일이다. 또는 음의 무한대로부터 양의 무한대 사이의 어느 점이다. 더 많은 옵션이 있고, 매번 선택을 해야한다. 선택은 종종 고통이다, 선택을 되돌아보고 설명하고 배우려고 해체하고 다시 재조립하며 읽는 일은 더욱이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 수업에 대한 집착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기술적 정보를 스쳐가나마 알게되는 일은 달콤하다. 진짜 기술을 몸에 익히지 않고도, 나를 헤집어보지 않고도, 무언가를 하는 듯한 충족감을 손쉽게 느낄 수 있다.

(한번 정확히 적자면, 여기서 말하는 기술, 즉 테크닉은 시도와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겹겹이 쌓아올려 구체화된 각자 작업자의 기술이나, 학생으로서 여러 영역을 깊게 배우며 표현을 부스트하기 위한 연습으로서의 기술 등에 대한 게 아니라, 이제 막 입문한 수준에서 표현 대신 기술을 욕망하는 현상에 대한 것이다.)

기술과 같은 손쉬움을 좇으면, 그래 컴퓨테이션이 되는 로봇이 찍는 게 제일 나을 것이다. 로봇은 그런 규범적 관념적 스탠다드라는 틀 안에서 튀어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내 삶은, 인간의 삶은, 유기체의 삶은, 튀어 나가야만 산다. 고이면, 멈추면, 틀에 갇히면, 똑같으면, 질서정연함 안에 수긍하여 그저 거기에 앉아있으려고 하면 낮은 엔트로피의 단계에서 주저 앉아 있으면, 물리적으로 그것은 죽음, 죽음에 가까운 고요, 적막, 굳음, 생명없음과 다르지 않다.

표현, 기술… 그 사이의 균형. 수업운영과 설계에서, 어떻게하면 좋은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고집을 부려, 부러 일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원하는대로 기술정보를 주면 될 일 아닌지 자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무지 이 부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특히나 막 시작한 사람에게 그런 주입적 정보를 주는 것은 고유의 개성과 생각이 필 기회를 미루는 또는 회피하는 또는 말살하는 결과에 더 빠르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제도권 내에서 살다보면 자기 생각 펼치지 않고, 입 닫고 살 기회, 또는 입 닫으라는 사회적 압력은 강하고, 수없이 겪는다. 정말 잦다. 그것이 디폴트인 문화이다. 그래서 사진 수업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 과정이 마냥 편치는 않을 것이다. 좋은 균형을 찾는 일, 받아들이기에 어느정도 매끄러운 교수법을 찾는 일, 참여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일. 그렇더라도, 나는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생의 의미와 사회의 면면에 의문을 갖고, 보는 눈과 더불어 이질성을 발견하는 예민함을 가꿔갈 수 있길 바란다. 관념에 속기 보다는 눈을 제대로 사용해서 관찰하고, 생각하고 감상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찾고 부여하고 씹고 즐기고 음미하고 눈부시게 세상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감격하고 감탄하고 경탄하며 나아가 아름다움을 전면적으로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애정하고 사랑하며 이해하고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늘려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관조를 통해서든 집중을 통해서든, 내가 아닌 어느 상대의 삶의 내용, 고충과 기쁨을 헤아릴 수 있는 힌트를, 세상과 이미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래서 표현과 감상에 대한 수업 만큼은 양보를 못하겠다. 표현을 연습하고 수행하다보면 관찰을 잘하게 되고, 내 세상을 잘 관찰할 수 있다면 다른 세상 역시 자기 고유의 시선으로 감상하며 해석한다. 그리고 그 접점에서 건강한 상호작용, 건강한 모방과 재해석, 재생산 즉 융합이 촉발된다. 그렇게 사진을 통해 나에게서 나아가 세상과 만나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으로 천착해볼 문제는 “어떻게 표현과 감상 수업을 구성해볼 것인가” 라든가 표현-기술 사이의 균형을 어느정도로 가져가며 전달력을 높일 것인지 등이다. 국내외의 워크샵을 많이 보다보면 선구자(선각자)들의 아이디어가 꽤 재밌었다. 또 내가 활동했던 프로그램들 속에서도 힌트가 많을 것이니 스스로 보물지도를 그리고 찾는 여정이 될 듯..

그리고 며칠 전 읽은 책에서 영역은 다르나 작자의 생각으로부터 많은 공감을 느꼈던 부분을 올려놓는다.

(『우리의 정원에는 시가 자란다』. 앤더스 프레드릭 스틴. 미메시스 (링크))

Navigate

Posts

Photo Series (Upda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