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식물과 초록 (16): 19년도 도쿄와 서울 / 초조한 마음 뒤엔 두려움이 있다. 무엇을 겁내는가? 어떻게 겨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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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작업 사진은 아래에 있어요👇🏼👇🏼)

수입 없는 삶을 앞둔 자의 초조함 분석과 해결책

오늘은 하루종일 몸이 으슬으슬 춥고 마음은 덜덜대며 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처음엔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 지금 필요한 책을 읽었다. 졸렸다. 이 햇빛 좋은 날에 보일러를 키고 방바닥과 이불 사이 뜨끈한 공간에 들어가 낮잠을 잤다. 외로웠다. 사람들 목소리가 나오는 동영상을 켜놓고 정체모를 토마토 템페 스튜 요리도 했다. 허했다. 따뜻한 걸 먹어도 가시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주욱 초조했다. 아무것도 해놓거나 결정하지 못한 채로 3월이 된 것 같았다.

3월인게 왜 문제일까, 다음주면 (다다음주던가) 고용보험 실업급여의 마지막 지급 회차가 도래한다. 이제 나의 현실에는 낙숫물처럼 적더라도 통장 잔고를 조금씩은 메꿔주던, ‘약속된 수입(급여)’이 없을 예정이다.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안정적인 환경에 익숙해지면 스스로 고여가고 위험하다, 어느정도는 불확실하고 그래서 유연할 때에야 재생과 개선의 가능성이 더 열린다.” 이런 생각들이 쉬는동안 내 속에서 발화되었지만, 곧 약속된 수입이 없을 상황에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는 꽤 큰 심적 부담으로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거대한 불확실의 파도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예전에 회사 이직을 할 때면 마치 배에 승선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지금 탔다 언젠가 내릴 배이지만, 시간을 보낸 뒤에 내가 보고 경험하고 배워서 익혀 나갈 게 무엇일지 가늠하는 셈이었다. 이 배의 선장격인 대표는 어떤 스타일의 리더십을 가졌는지, 이 사람이 몰고가는 이 조직은 어떤 배인지. 마를 일 없는 자본이 떠받치되 도무지 속도를 낼 생각이 없는 거대한 저속의 유조선인지, 아니면 앞을 깨부시며 항로를 개척하되 추운 날씨를 버텨내야 하는 쇄빙선인지. 이 배가 나르는 것은 무엇인지, 누가 탔고… 생각은 이렇게 이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바다도 아주 조금은 알고 수영도 어느정도 배웠으니 바다수영에 나가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맨몸에 수영복만 입고 불확실의 바다에 떨궈지는 듯 하다. 아니면 뗏목을 만드는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워, 얼기설기 엮어 만든 널빤지 배를 띄우기 직전인지도 모른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망망대해에 떠있는 작은 배가 생각난다. 그 내용을 새삼 다르게 느낀다. 이제 힌두적 해석은 고차원적이다, 오늘 마음이 조급한 나는 그런 철학은 사치이다. 안정적인 배에서 살던 어린 인생이 어느 날 떡 하니 바다 한가운데에 동동 떠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표상하는) 호랑이 하나를 조련해가며 어떻게든 버티고 항해하는 방법을 익혀, 결국은 자신을 품어줄 땅에 도착하는 얘기였다.

맞다, 내가 지금 그 상태이다. 모선에서 내려, 오롯이 내 힘으로 바다를 터전화 해야 하는, 혹은 바다를 건너 어디론가 다다라야만 한다. 내 두 발로 딛고 서서 밟을 땅을 찾는 여정의 시작점이다. 그야말로 중년에 대비한 청년기 끝물의 실험이다. 청년기 초반에 집에서 나올 때 그랬듯, 자기의심의 실체 근처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얼마나 걸릴까, 이 다음이 있기는 할까? 혹시라도 지금까지 생각한 자기 이미지와는 달리 스스로가 급여를 주는 회사 안에서가 아니면 혼자 뭔갈 해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혹시라도 아무것도 안하며 극도의 가난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내 불안의 원인은 갑자기 세이프 마진이 0%로 줄고 불확실의 마진이 100% 확장된 상황을 인지했기 때문이라면, 불안이 뿌리내린 감정적 실체, 모체는 바로 이부분이다. 미래의 내가 더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고 ‘실패’하기를 선택할까봐 나는 두렵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안하기’를 선택하며 미뤘던 스스로를 알기 때문이다. 이 초록 프로젝트도 벌써 2주째 사진만 고르고 있지 않은가. 고민하겠다던 로드맵은 어디로 갔지? 무엇을 어떻게 이루고 싶은지,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왜’ 이런 삶의 방식을 취하고 싶은지에 대한 충실한 고민과 답을 회피하고 있다.

그렇다. 지금까지 나는 안하기 위한 핑계가 참 많았다. 작년까지는 직장근로의 상흔을 회복하는 시간으로 여겼고, 올 초는 이런저런 일로 바빴다. 그러나 이제는 수입이 없을 예정이므로 ‘(시작하지 않기 위한) 도망갈 핑계’가 우선순위를 장악할 수 없다. 나를 일으켜 세워서 뗏목을 건조하든 조오련으로 거듭나든, 매일 어디론가로 나아가며 해내야 한다.

지금보니 내가 초조했던 까닭은 여럿이다.

먼저 이 불확실함의 파도동굴 앞에서 그에 맞서야 하는 상황 자체가 불주사를 앞둔 아이처럼 나를 만들었다. 두번째로 내가 나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잘못 선택했는지도 몰라, 실패자로 남는 선택을 앞으로도 할 수 있어’ 라고 자꾸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어둡게 생각했다. 내 성향과 경험을 고려할 때엔 지금 이 길이 가장 가능성이 크면서 스스로 인게이지먼트도 높은 옳은 선택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두번째 ‘미래의 내가 포기나 패배를 선택하면 어쩌지’ 와 이어지는 얘기인데,) 바로 이 일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철저하고 충실한 고민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스스로에게 승선하였으니 이자를 믿고 따라가야 하는데, 이 선장이 아직 ‘어떻게 할지’를 아직 고민하지 않은 상태인 것을 데드라인에 접해서야 목도하고 약간의 실망과 함께 살짝 화가 났던 셈이다.

배수의 진을 쳤으니 이제 해라 해내라 움직여라 이지은

(+ 오늘은 유독 힘들었는데, 평상시의 나는 이런 균열과 불확실성에 불안을 느끼는 순간을 크게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흥미롭게 여기며 어떤 신호나 계기로 해석한다. 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내가 도출할 결론이 무엇을지 기대한다. 특히 생존을 향한 불확실성을 마주할 때에는 그 직전까지의 안정감과 평온함에 내 마음이 대비되기에, 문제파악과 해결발굴에 집중한다. 즉, 마음의 신호가 나타나면 우선 다독이고 그 다음엔 “무엇이, 왜, 그럼 어떻게”를 생각한다. 이렇게 삶의 불일치가 포착되면 경계모드가 켜지지만, 균열은 곧 가능성 기폭제 같아서 대응체계와 대안을 모색하며 선택을 이어간다면 결국 다음 어디론가로 간다. )

오늘의 사진: 2019년도 가을 도쿄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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