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식물과 초록 (14): 19년도 아시시~제네바. 식물 아무개씨들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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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비해 초록/식물 사진은 왜이렇게 많은가. 내가 있는 곳은 거의 도시였다. 도시에 바다는 없을 수 있지만 조경은 항상 있다. 그러다 보니, 풀떼기만 보여도 갈무리 하고 있는 지금에는 선택지가 많다.

조경은 사람의 도시 생활에서 그 환경을 채우는 요소를 가리킨다. 조경은 배경이다. 배경을 주인공으로 끌어들인 사진을 찾을 것인가, 환경으로서 어우러진 사진을 취할 것인가 이제야 고민한다.

나는 이 작업을 하기 전까지, 당연히 내가 식물이라면 가릴 것 없이 다 좋아하고 또 그것들은 어느것이든 심신을 편하게 기능할 것이며, 내가 길에서 만난 식물이라도 꽤 집중하여 눈에 담고 찍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사진을 보면 볼수록, 나는 식물과 초록의 활용 수준이 매우 초보적이다. 이럴 수가!?

나는 산을 가까이에 두고 걷고 보는 시간이 좋아서 산기슭 근처에 산다. 너른 산을 눈에 담고 햇빛이나 스치는 바람들이 만드는 그 움직임에 안정이 된다. 자주 보는 식물은 정도 든다, 같은 곳을 어김없이 지키고 있으니 그럴만하다. 집에 오는 길에 있는 나무들은 집과 다를바 없이 안정감을 준다. 버스정류소 옆 공원 나무들이 지하철 공사로 베어지던 날에 발을 동동 굴렀다. 겨울이면 목련을 대단하게 피어내던 한 건강한 나무의 허리가 뎅강 잘려나갔다. 우리는 친구를 잃은 듯 상처받았고, 동네 어느 사람은 대자보에 시를 써 버스정류소에 걸었다. 회사에 살 듯 일할 때에는 책상 양 옆으로 블루스타 고사리와 테이블 야자를 놓았다. 출근과 퇴근길 인사를 하고 나를 반기는 식물들은, 팔다리도 입도 얼굴도 없지만 동료이다.

삶의 특정 공간을 지키며 어김없이 마주치는 식물은 마치 어떤 한 사람처럼 어느 한 구성원으로 기능하며 애착의 대상이 된다. 한편 ‘조경’으로 꾸며진 식물은 뭐랄까, 개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각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뭉테기 배경같다. 넓고 힘있는 납작붓을 종이에 90도로 세워서 쿡쿡 찍어가며 나뭇잎을 채우는 화법을 구사하여 묘사한 나뭇잎은 전혀 개별적이지 않다, 그저 화폭에 초록을 등장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오는 길의 양옆을 채우는 식물은 그저 ‘어떤 초록이들’ 수준이며 주인공으로 삼질 않는다. 마치 사람으로 따지면, 내 친구가 아닌 어떤 아무개씨들 같다. 버스와 지하철과 엘레베이터와 공항의 아무개들과 다를 바 없다. 배경에 녹아들어있다.

도시 여행자에게 나무 사진은 그래서 어렵다. 도시조경의 관점에서 길을 채우는 식물들은 삶의 환경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다. 그 식물이 거기에 심겨진 채 남아있는 이유이다. 걸거치기지도 크게 눈에 띄지도 않는다. 조성할 때부터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기를 목적했고, ‘나’도 그 세팅 안에서 세상을 봤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반면 같은 ‘배경’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라도 ‘내’가 의도적으로 숲을 만나러 산에 가거나, 식물의 생김새에 집중하며 부분마다 시간들여 관찰을 한다면 비로소 고유의 아름다움을 바로 맞이하고 마주할 수 있다.

즉 지금 내 사진이 별로인 이유는 사진을 찍으며 식물관찰에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물이 주인공이 아닌 사진들을 두고, 그저 거기에 너른 포션으로 식물이 있대서 고르는 게 무슨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바이오필리아적 해외 조경의 사례 연구? 또는 삶의 배경으로서 초록의 역할? 공원이 만드는 삶의 정경?

다시 고민해보자. 나는 식물이 삶의 배경을 채우는 것을 고르고자 하는가, 아니면 식물이 주인공인 사진을 고르고자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왔다. 식물, 식물이 배경도 조연도 아닌 주인공인 것을 찾아라!

하지만 오늘 사진도 역시 배경이구나. 그렇다면 좋은 배경이었기를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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