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때의 행정실장 선생님이 개소한 건축사무소의 내부 데이터 구축 세팅을 도와드렸다. 기술직과 영업직 직원분들이 걸거침 없이 편히 쓰면서도 주요 운영자의 관리비용이 적게 나가도록 자료구조와 권한정리를 하고 사용하실 분들에게 짧은 교육을 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풀까 고민하시지만 막상 나에게는 쉽게 풀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도와드릴 때에 기쁘다.
몇년 전 부동산 회사에서 CRM을 도입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직원, 고객, 운영의 데이터를 하나의 스트림으로 연결하려고 몇 달을 끙끙 댔고, 그 뒤에는 다함께 쓰게끔 하기 위해 교육에 많은 공을 들였다. 유입-응대-계약-관리-재계약으로 이어지는 회사의 데이터가, 일하는 사람들이 쌓는 줄도 모르고 쌓도록 파이프라인을 짜고, 그 데이터들이 누수없이 한 곳에 모이도록 하는.
그 모든 것은 인내심의 시험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업체가 겪고 있는 문제적 현상의 본질을 파고들기 위한 집요함이 필요했고, 솔루션을 현실화한 이후에는 기존 컴포트 존에서 한발짝 모두가 옮겨오도록 돕는 데에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 덕분에 오늘 선생님 회사의 문제를 단 몇분만에 풀 수 있었다. 여러사람이 쓰기 편한 것을 전제로 했을 때의 가장 간단한 형태의 자료구조, 누구나 사용가능하도록 교육 코스트가 제일 적은 형태인 것. 몇 단계로 단순화한 튜토리얼에 참여시키는 것, 부족한 부분은 교육이 서로 될 수 있는 관계를 은연 중에 만드는 것.
우리는 종종 원포올 형태를 기대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자료 하나를 올려놓고, 그걸 올린 사람, 시간, 이미지의 내용에 기반해서 자유롭게 검색하고 자료 배열이 되도록 하는 것, 파일명도 아무도 뭘 하지 않아도 아주 멋지게 바뀌어 있는.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이미 파악이 되어있는.
이런 상상과 기대가 있는 것은 우리 머릿 속에서는 이런 구조화와 검색이 아주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AI 시대에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어렵고, 주요 사용자 스스로 데이터 구조 측면에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면 제대로 쌓는 것에도 꽤 큰 코스트가 든다.
그래서 최초의 세팅이 중요하다. 앞으로 바뀔 수 있도록 유연함을 어느정도 견지하면서도, 가장 기본의 축, 권한과 내용의 구조는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가장 핵심적인 뼈대의 관점에서 구성해놓는 것. 즉, 이것을 만드는 지금은 최초시점이지만, 이미 업의 본질에 의하면 바뀌기 어려울 아주 밀도높은 것들을 먼저 선별해야 한다. 그것들은 어차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든든한 구조재로 쓴다. 나는 이런 과정이 재미있다.
그렇지만 회사일을 관둔 이후로 스테미너가 그 전 같지는 않았다. 4시간이 지나자 배터리가 또로로-하고 떨어졌다. 신체적으로는 피곤하였도다, 하지만 아주 보람있었다.
뭣모르고 겪어내며 성실하게 살았던 것이 모두다 내 안에 남아있었다. 그 간의 압박 안에서 시간과 경험이 응축되어졌던 것인지, 선생님과 동료 분들을 즉각적으로 도울 수 있었다. 아주 좋다, 이거면 그 대가로서 충분하다.
그러고보면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시간이 내게 남는 유일한 데이터였다. 오늘에 사는 것이 결국 내일 내가 가져가는 모든 것이라서, 내가 값지다고 생각하는 영역에 시간을 투입하고 생각을 집중하는 편이 기분이 좋다. 그게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능력 내지 자산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사무실에 있었어서 낮 사진 없다, 작년 이맘 때의 파이 사진으로 대신한다!
오늘의 휴식은 차이코프스키의 더시즌즈 op.37과 함께. 발레 클래스 연습곡 악보를 보다가 발견했당.
피아노 학습에 관하여
근처 청소년 문화시설의 업라이트 피아노 연습실을 11월부터 월 3만원에 빌리게 되었다. 운영 시간 내 수업 중이 아니라면 언제든 쓸 수 있다. 이런 시설을 운영하시다니 빛과 같으시군요. 백수가 된 뒤로 지자체 복지의 유능함과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한동안은 개인교습 없이) 이 공간에서 그간 배운 것을 정리-복습하고, 바람직한 움직임을 손에 붙이고,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짧지 않은 시간동안 모아온 나의 레퍼투아도 소화할 생각이다. 많은 연습을 해야지.
그렇게 노력을 몇꺼풀 더 끼얹어 지난시간 내게 흘러온 가르침들이 충분히 내 몫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 그 뒤에, 다시 새 선생님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