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의 10월 13일. 몇년 전 오늘과 같은 날짜.
이 시절 나는 사회학 책에 꽂혔었나보다. 요즘은 철학, 경제학, 물리학 책을 중심으로 빌린다.
아래에 최근 몇달 간 읽은 책 중에 나의 성향과 제일 닮았던 독서를 붙여넣는다.
저자는 탕누어, 제목은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2020), 번역은 김택규,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내놓았다.
리뷰는 아니고, 줄친 부분만 붙인다.
많고 길다. 그래도 재밌다.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2020), 탕누어, 번역 김택규, 출판사 글항아리
ISBN 9788967357948
종이가 얇더라니, 책은 굵지 않은데도 500쪽이 넘더라. 문장과 단어가 시장말 처럼 복닥거려 생생하긴 했지만 좀 트리밍을 하고 싶기도 했다. 정리에 짜투리를 모아보면 8시간 정도는 쓴 것 같다.
[생존 임계선]
p14.
- 상식의 결정이 출현하면 사색과 발견의 과정은 생략된 채 결론만 소비된다. (\경제학에서 법칙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설/모델을 의심없이 사실로서 무조건 수용하던 학생의 모습이 생각남)
- 연결되지 않은 상식 간의 공백. 상식 간의 대립.
p32.
- 시인이나 화가는 어느 도시나 산골에서 누가 그들의 시를 읊거나 그림을 감상할지 알지 못한다.
p38.
- 체호프가 쓴 글의 따스하고 즐거운 웃음소리는 음습하고 더러운 구석에 산뜻하게 피어난 꽃
- 어린시절의 상처는 그의 소설창작의 견실한 재료
- 거대한 하층민의 세계를 “행복한 시로 변화시켰다.” (\보르헤스의 인용)
p49.
- 사람은 생존의 사슬을 끊어버리면 자유로워진다.
p56.
- “단테의 『신곡』에서는 35세를 인생의 딱 절반이자 삶이라는 여행의 반환점이라고 말했다.”
p67.
- (소로의 월든호수 실험을 말하며) 인간의 생활필수품은 무엇이며 그를 얻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본다면, 인간에게는 확실히 노동량과 시간을 줄일 자유가 있으며 그 남은 시간에는 당장 삶을 위한 일을 시작할 가능성이 생긴다.
p69.
- 하지만 45세에 기관지염으로 사망한 소로의 사례를 들어 역시 인간에게는 좀더 많은 생활필수품이 필요한 것 같다고.
- (45세에 대해) “고고학 연구로 밝혀진 초기 인류의 평균 수명과 상당히 가까우며, 인류가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기 이전의 생물적인 천연 수명과도 대체로 같다”
p82.
- 고리오 영감의 비극이 일어나는 장소는 거주지인 보케 하숙집이 아니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 ‘여분의’ 자유로운 장소와 시간에서 발생했다.
- (노자를 빌려) 인간이 생존 한계선 위쪽으로 올라간 뒤에야, 본래 인간에게 없었던 생각과 행위와 표정이 인류세계에 나타났다.
[부의 흐름을 막는 권력]
p109.
- 권력은 자신의 경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횡포하거나 순식간에 전락한다. 권력의 동물성
- 부는 경계가 없으며, 먼 곳도 갈 수 있다. 부는 흐르는 물과 흡사하다.
- 부는 이계를 향해 ‘진출’한다. 이것이 권력의 비위를 상하게 한다. 질서도, 충성도 없고, 권력의 속박을 싫어한다.
- 부의 흐름을 막는 갖가지 장애는 대부분 권력이 마련했다.
p125.
- 오프라 윈프리의 블랙카드와 몬테크리스토 백작 당테스가 원수 앞에 꺼내들었던 (대륙 3대 은행장이 서명하여 보증한) 한도액 무제한의 신용장 얘기.
p129.
- 소로는 윌든에서의 아름다운 숲의 묘사를 통해 우리를 유인한 것이다.
- 좋은 것이 우리쪽으로 올 때엔 이미 변질되고, 부패하며, 빛을 다 잃은 상태이다. 우리가 가야만 하며, 그것이 오게 해서는 안된다.
- ‘운반’될 수 없는 것들: 건드리기만 해도 손상되는 딸기, 아침이슬, 호수 속 반짝이는 물고기, 수면 위의 구름 그림자, 사계절이 만드는 변화
- 명예는 바람을 타고 전달되고, 권력은 관계의 역학이니 자기장처럼 진공 속에서도 진행된다.
- 반면 부는 무거운 ‘실체’를 매개로 한다.
p130.
- 존 로크는 화폐를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신’이라 불렀다.
- 화폐는 사라지는 인간 노동의 성과를 소유가 가능한 형태인 변질되지 않는 영구적 사물로 바꿔준다.
- 부는 모두의 것이다. 부는 생물적인 수요와 연결되어 있다. 부만이 생명과 희망을 연장해줄 수 있다. 부는 ‘통용’된다.
p135.
- 조개, 직물, 도끼, 소금, 곡식, 찻잎, 보석의 화폐실험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 실물의 종류가 세계 각지에서 고도로 일치했으며, 수렴진화의 양상을 보였다.
- 이질적인 사회와 문명 사이에서도 부는 통용되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거나 빼앗으려 주판알을 튕기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상인들의 대화는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대화보다 간단했다.
- 마치 공동의 언어라도 있는 것처럼, 경계가 모호했다. 시종일관 부는 전지구적이었다.
[부와 화폐]
p141.
- 금은 수량이 고정적이고 탄력성이 낮아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규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 화폐는 신용성을 띠며, 화폐의 간계는 다 여기에 집중된다.
p145.
- 챕터 제목: “화폐의 간계는 신용에서 생기고, 신용 속에 숨어 있다”
- 즉, 신용은 화폐의 본성이다.
p147.
- 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는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으며 인류세계에 비범한 공헌을 했기에 그런 부를 얻을 수 있었을까?
- 이런 질문은 자기도 모르고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본래는 되고 싶지 않았던 인간으로 변하고 마는 것을 방지한다.
- 시작은 작았으나 미래에는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려) ‘그것은 거대한 강이었다’
p149.
- 공기와 햇빛이 없는 것은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화폐가 없으면 눈 앞의 세상 전체가 무너진다.
- 화폐의 일상적인 통치, 때때로 오는 광풍과 약탈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다.
- 우리의 가치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수정하며 협조할 수밖에 없다.
p151.
- 2000여년 전, 예루살렘은 성전에서 통용되는 화폐인 세겔로 환전을 해야만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장엄한 신전 앞은 시장통처럼 번화했고, 최초의 월가라도 되는 듯 사방에 돈이 굴러다녔다.
- 이것이 젊은 예수가 처음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보게된 광경이었고, 그는 오늘날의 월가점령 운동의 참가자들 마냥 좌판을 뒤엎고 채찍으로 환전상들을 후려갈겼다.
- “화폐의 간계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 것은 이토록 유구한 역사가 있다”
p155.
- 보석. 쓸모없지만 비싸기 짝이없고, 누구나 원하는. 가치와 가격이 완전히 동떨어진 그 물건. 거래이론과 가격이론 바깥에 존재하는, 말하자면 최초의 고액권.
p159.
- “당신이 길에서 지폐 한 장이나 동전 한 닢을 줍는다면, 누군가의 한 시간, 하루의 노동 성과가 저절로 당신 게 되는 것이다. 마치 당신이 완수하기로 한 것처럼. (이것이 화폐의 간계의 원형이다.)”
- “당신이 정상적인 부모의 자식이라면, 맨 처음 눈 뜨고 울음을 터뜨린 그 순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당신의 전대, 전전대의)이 평생 힘들게 땀 흘려 얻은 노동의 성과를 갖게된 것이나 다름없다.”
- “화폐는 경이로운 수용력과 시간의 침식에 대한 저항력으로 아득히 오래된 생사의 윤회설을 지켜냈다”
p162.
- “상업적으로 그렇다면 이미 끝난 얘기다. 그것이야말로 천상의 법률이다.”
p165.
- “당신은 현지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화폐만 있으면 평생 몰랐던 사람도 알아서 당신을 접대하고 시중들 것이다.” 살뜰하게.
- 화폐는 연결고리로, 이를테면 여행지에서 화폐를 쓰는 것은, 좀 기묘한 방식으로 이질적인 세계와 그곳의 사람들에게 연결시켜준다. 현지에서 돈을 안쓰면, 그곳에 안 간 것이다 다름없다.
- 여행지의 시장과 슈퍼마켓 진열대의 상품의 종류와 양식, 수량, 장식을 통해 현지의 진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의 사람들이 매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원하고, 쓰고, 강조하는 것들 그리고 ‘없는 것’들, ‘강조하는 사실’들까지.
[자본주의와 부]
p169.
- (소로의 윌든호수 때문에 특별히 보호를 받았던 그 지역과, 오두막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재건된 일을 통해) 명예가 우리를 위해 성공적으로 해낸 일로서, 명예는 부와 권력을 패배시켰다.
p176.
- ‘윌든’을 중국의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다 (\아니 정말….?)
- “소로는 금욕적이며 방종하고, 근면하며 활달하고, 현실의 부를 경멸하며 상업 거래를 흥미로워한, 진보적이며 너그러운, 건강한 프로테스탄트”
-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대단하고 강력한 이유는 ‘(인간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는 가치와 그에 대한 신념같은) 특수한 조건’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 자본주의의 토대가 된 최대공약수는 인간, 인성, 생물적 본능.
p179.
- 최초에 자본이 형성되던 때에는 잉여가 별로 없었다. 자본주의의 형성은 본능을 거스르며, 금욕적인 태도로, 기본권을 희생하며, 지극한 인내를 통해, 삶에서 잉여를 뽑아내어 이뤄졌다. (\한국전쟁 직후의 재건 세대의 검소함이 생각난다. 물질적 향유라는 단어를 알기는 할까? 인생의 모든 것을 극도로 아껴서, 결국은 재산으로 교환했다.)
p181.
- 권위적인 힘은 도덕을 가혹하며 냉혈적인 것으로 승화시키고 그 율법은 삶의 구석구석과 말단까지 파고든다.
- 시간이 지나 나이든 권력은 나이든 사람처럼 나태하다. 향락에 이끌리고 자제력을 잃는다.
p182.
- 자본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며, 자본주의의 발생은 인간의 욕망이 가동됨에 따라 나타났다.
p191.
- 화폐가 금속에서 종이로 대체되며, 신용화, 증빙화, 장부화로 진화.
- ‘종이에 적인 것’만으로 세상 전체가 눈물 한줄기조차 흘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 존재를 창조하고 사용할 때 인간은 그 존재의 진정한 잠재력과 실현양태를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p197.
- 토지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수량이 고정적이고, 거의 늘어날 리 없이 상당히 독점적이며, 배타적이고, 제로섬적이다.
p200.
- 사람은 하루 8시간 일해서 돈을 벌고, 16시간은 그 돈을 쓴다. 화폐는 24시간 일하며 돈을 번다.
p203.
- 기업의 실패로 기업가가 잃는 것이 있다면, 새로운 부의 세계에서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야심으로 그치고 비참한 부자가 되는 것 뿐이다.
p206.
-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교훈 — “커야 망하지 않는다”
- 임계점 아래에서는 사태의 책임을 본인들이 지지만, 위의 세계는 다르다.
- 법률이 협상의 대상이 되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도 적용되지 않는다.
- 경제학자들이 지금껏 경제세계의 유일한 상벌(징벌) 체계라고 주장한 ‘시장’의 규칙은 충분히 규모가 크다면 통하지 않는다.
p210.
- 세계만 둘로 나뉠 뿐 아니라, 규칙, 율법, 삶의 태도와 생활방식, 부까지도 두가지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훼손되지도 소모되지도 않는 부와, 하루 아침에 증발해버리는 부.
- 아이슬란드 신화 <사가>의 최후의 날에 관한 묘사. 훤한 대낮에 순식간에 전국이 파산하는 것을 비유. (\나의 경험에서는 Terra가 UST의 unpegging 사태로 돈을 ‘증발시킨’ 5월의 그 봄날, 주변 사람들의 패닉. 곧 몇개월 후에 발생한 FTX-SBF의 파산이 생각난다. 자기과신이 크고 사회의 율법과 법 앞에 무모하며 위험의 가능성 앞에 안일한 태도인 사람들이 맡은 초대형 규모의 돈은 그렇게 ‘어디론가 없어졌다’)
- 1퍼센트의 사람은 모종의 은밀하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위에서) 99%를 조종한다.
- 1퍼센트의 사람들은 인류의 출산으로 인한 반사이익을 일정한 비율로 본다.
p214.
- 몹쓸 역사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 성공한 자에게 성공의 이유를 찾는다.
p216.
- 의대와 전자공학과를 월등히 뛰어넘은 금융학과 학생들의 부? 성과를 예측하고 정확히 계획하여 차근차근 나아간 것이 아니다.
- 처음에는 전혀 몰랐던, 신비롭고 변화무쌍한 삶의 흐름이 낳은 결과.
- ‘시간차’-중국의 ‘도룡지기’. 스승에게 용을 죽이는 기술을 배워 하산했는데, 세상에 더이상 용이 남아있지 않더라.
- 예지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부귀열차’를 탄 것. (\AI, 나의 부귀열차가 되어줄래?)
[사유]
p223.
- 나바호족은 거짓말을 금하지 않는 대신, 장기적인 대가를 조심하게끔 처세술을 가르친다.
- 같은 거짓말을 세 번 하면, 그 거짓말은 자신을 옭아맨다.
- 마지막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
p228.
- 우리는 신이 보고 있으며, 기억하고, 공정한 보상을 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산상수훈)
- 기독교에 신도를 끌어들인 종말론 체계로 발전.
- 신도들은 지나치게 긴밀하고 서로 간 투명한 단체가 되어 신성한 마음과 부드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가정과 프라이버시에 ‘침입’한다.
p241.
- 맹자의 “오래도록 빌려 돌려주지 않는다면, 자기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을 어찌 알겠느냐” ➡ 흉내를 낸다면 부지불식간에 진실로, 자기 것으로 변하며, 실속없이 허세를 부리던 본래의 자신도 까먹게 된다는 것.
- 누군가를 닮고 싶다는 것 또는 시간을 넘어 경외심을 품어야 하는 훌륭한 것들이 있다는 것.
- 그렇다면 삶의 경관이 그렇게 밋밋하고 황량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 인간의 수명을 한참 뛰어넘는 대시간 — 인간의 특별한 의식이자 사유.
p245.
- 매스미디어에 어떤 사람이 다뤄질 때에는 ‘등장’과 ‘사멸’이라는 두번의 피크가 있고, 개중엔 더 극적이고 더 눈길을 사로잡는 효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 매스컴은 사람 마음의 그 음습한 부분을 ‘기본적인 인간성’으로 확대하고 이해한다.
p249.
- 권력과 부는 정면대결 해서는 안된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p251.
- 벤야민의 극적이고 감동적인 사후 명예는 누군가 세밀하고 신중하게 그의 책과 말과 필요한 역사적 실마리를 그 특수한 시간의 소로에 보내주고, 또 벤야민의 훌륭한 가치를 알아본 몇몇 사람이 지켜낸 결과다.
- 이것은 사람들이 묵묵히 주워모은 결과이지, 고대의 유물처럼 출토된 게 아니다.
p258.
- 사람들은 유일신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의 명령이나 계획에 복종하고 싶어하며, 동시에 어떤 정글의 상태로 돌아가려 한다.
- 민주적 사유로서 평등의 주장은 착각이다. 각 개체와 세력이 대등하게 모종의 평화로운 정역학적 평형을 이룬 적이 없다.
p262.
- 영국의 역사학자 액턴 경의 우아하지만 단호한 명언: “당신의 말을 난 한 마디도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는 내 목 숨을 걸고 보장하고자 한다”
- 사상과 언론의 자유의 한계선,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필수적인 옹호와 기대
-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류의 고도의 절제를 의미한다. 적은 양의 옥을 위해 우리는 보기 싫은 한 무더기의 돌을 참아내야 한다.
p278.
- 자본주의의 선진국에서는 사유가 먼저 사조를 형성한 뒤, 사회의 집단적 선택이 따라온다.
- 국영에서 민영으로 전환하는 것은 진리와 계시같은 것으로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음흉하고 반동적이며 횡령을 저지르려는 사람으로 여겨질 법.
- 그 과정의 정재계의 이익추구와 결탁의 폐단은 필요악일 뿐.
- 공적 가치의 소실 법칙은 민영이 국영보다 우월하고 부가 권력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할 뿐.
p280.
- 장관이라는 직위는 충분히 능력 있는 기업의 인재를 끌어들이지 못한다. 또, 기업에서는 자못 똑똑했던 사람들이 내각에 들어가자 멍청해진다.
- 국가는 기업이 아니며 동시에 상호 충돌하는 여러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시민 하나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데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선택은 그들이 능숙한 계산보다 어렵다.
[인간과, 문화와, 민주정치라는 생존양식]
p294.
- “인간은 정말 특별하면서도 그리 특별하지 않은 생물이다” (고생물학자 굴드의 말이라고 함)
- 생물계의 시점에서는 인간의 신체 구성이나 본능적인 행위는, 특별히 독특하고 두드러지지 않는다.
- 우리의 몸은 자동으로 흡수하고 방어하고 운반하고 분배하고 합성하고 생장하고 쇠퇴하고 병들고 와해한다. 개인은 아예 할 줄 모르는 전문적인 화학 공정이,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다.
- 어쩌면 우리 몸은 하나의 신체가 아니라, 마치 독립된 기원을 가진 미토콘드리아와 편모를 가진 미생물들 모발세포의 집합을 만든 것일 수도, 그래서 독립적인 미세 생명체가 교묘히 결합해 함께 사는 것일 수도. 그래서 우리 몸은 작은 진화의 장이거나, 부분적 전장이다.
p295.
- 인간은 또한 특별하다. 우리는 카를 야스퍼스의 말처럼 1만년 전 어느날 지구 곳곳에서 ‘각성’하였고, 인간만의 세계 구축이 시작되었다. 고대문명과 사유, 의식.. 생물적 본능으로 귀결될 수 없는 자유의지의 발현.
p298.
- 인간이 생물을 초월하여 갖고 있는 기묘한 부분은 개별적이고, 불일치하고, 선악이 불분명하며, 그 자체로 모순되고, 충돌하며, 상쇄적이다.
- 이 인간의 특성을 이해하면 인간의 원시와 야만으로 퇴행하는 현상, 인간이 어째서 수천년 쌓아온 지식과 비범한 능력을 마치 쓰레기처럼 하나씩 버리는 것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우리 사회의 특별하고 필수적인 요소는 민주정치.
p302
- 민주주의 정치는 저지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지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집단 생존 양식.
- 민주주의는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며 편안하여 생명 본연의 독립적이고 예속되지 않는 그 속성에 부합하기 때문에 마치 필연적으로 도달한 결과처럼 보인다.
p314.
- 상대주의는 극소수의 관용적이고 신중하며 자제력이 강한 선량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압도적으로 많은 허세나 부리는 나태한 자들을 줄세웠다. 상대주의는 가장 근본적인 시비와 선악의 판별을 (인간의 가치, 신념, 도덕의식과 더불어) 개인의 취향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 문화는 인간과 사회가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온 판단과 선택과 실천이기 때문에, 이 ‘판단과 선택’을 구분하지 않고 포기한다면 내용도 깊이도 저항력도 없는 원자화된 개인으로 내려앉을 뿐이다.
p319.
- 일본은 현대혁명의 거대한 도끼를 귀신같은 솜씨로 두 번이나 피했다. 막부말 유신은 도쿠가와 막부가 역사의 과오와 책임을 지고 메이지 천황이 통치의 자리에 복귀했고, WWII이후 동맹국과 맥아더 장군은 역사의 정의 일부와 천황제의 존속을 맞바꿨다.
- 그리고 오늘에는 부를 핵심으로 하는 전 지구화의 열풍이 세번째의 현대혁명으로 놓여있다. 우리는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지식]
p325.
- 지식이 몸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지식을 얻은 뒤에 그 지식과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상의 실천 속에서 이해하고, 더 채우고, 미세하게 조정하여 나와 지식을 중층적으로 연관시켜야 한다. 이렇게 지식은 충분한 조밀도를 갖춘다.
- (탕누어는 이탈로 칼비노의 여섯번째 강의록 마지막 1/6이 완성되지 못한 채 칼비노가 사망한 것에 대해 큰 아쉬움을 표현했다)
p334.
- 지식 총량의 누적은 인간이 “총체적인 현상을 다 아우르는 해석을 찾는 것의” 난이도를 점점 높이고 있다.
- 일반인은 보다 간접영향을 받는다면, 최고수준의 지식과 기예에 오른 소수는 이런 상황에 궁극적인 허무를 느낀다.
- 칼비노는 이에 “극에 달한 ‘해박함’은 일종의 영롱하고 명철한 허무이거나, 허무에 투명하고 세밀한 양식을 부여한다. 인식의 빛은 곧 종점에 이르러 더 통찰할 힘이 없어 멈춰서고, 천천히 꺼져가는 그 시점에 오히려 비범하고, 아름답고, 광할하고, 더군다나 평온해진다.”
(\그리고 인류는 이 시점에 AI를 발명해버렸다.. 문명의 산소호흡기?)
p341.
- 감독 이안은 할리우드의 분업식 업무 프로세스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이것은 누가 먼저 책임지고 그 방대한 기초자료를 읽고 정리한 뒤에 제목을 뽑고 시나리오의 초고 단계까지 접어들어야 감독이 들어와 할지 안할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다.
- 여기에 허우샤오시엔 감독 스타일의 대비. 소로가 월든에서 얘기한 완벽하고 아름다운 지팡이를 만드는 인도우화, 10년에 검 한자루를 벼리는 오랜 속담과 같은 작업방식에 대한 찬사와 걱정과 조소.
[정치와 권력과 부]
p348.
- 개인이 완수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은 이 시점에, 정치 외에 총체적인 동원의 힘이 또 있는가?
p360.
- 박근혜, 아베, 리셴륭(리콴유의 아들)까지 정식 민주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상층부의 현상은,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에 역행한다. 보통은 민주선거가 세습화를 저지하는 기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p361.
- 클린턴 가문과 부시 가문의 사례 (\이 책의 원고는 2015년도 정도에 쓰인 것 같다)
p364.
- 박근혜는, 헌법의 보장을 받아 민주 선거라는 전환을 통해 선출되어 권력을 ‘재’수여 받았다.
- 즉 공개적이고 보편적인 익명의 등가 방식으로 전체 국민이 정중히 동의했다. 이 점이 인류의 전통적인 세습과 다른데, 모든 도덕점 약점을 일소해버리는 인증 수속을 거친 셈이다.
- 마치 돈세탁처럼, 투표를 통해 정치권력이 세탁되었다.
p369.
- 정치는 모든 사람과 관계되고 너무나 많은 이익이 그 안에 숨겨져 있으며, 인간성의 문제가 대단히 위험하다.
- 일본의 정치, 목수, 가부키, 스모 처럼 충분히 이익이 많고 장기간 존속한 가문에서 관찰되는 전문적인 성과
- 그러므로 정치는 안전/공정성과 전문적인 성과 간의 선택.
- 필연적으로 민주제는 아마추어화 경향의 정치제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p374.
- 민주 정치는 필연적으로 더 많은 돈을 쓰게 되어 있다.
- 민주 선거는 부의 힘에 의지해야만 순조롭게 돌아간다.
- 민주 투표는 권력의 세습을 끊고 권력의 공유를 실현하고, 사회 계층의 상하 유동을 원활하게 만들었지만, 돈이 매우 많이 든다.
- “민주 정치로 하여금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세습에 가까워지게 할 정도로”, 그러한 질적 변화를 일으킬 정도로 돈이 많이 든다.
p383.
- 권력의 부에 대한 의존은 마치 역사의 일방통행로처럼 늘기만 하고 줄지는 않는다.
p391.
- 선거는 처음엔 고정된 네트워크로 몇 세대에 걸쳐 은원의 감정이 누적된 ‘친분 사회’에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승패가 투명하고 안정적이며 일찌감치 정해져 있어 선거는 일종의 절차인 셈이었다.
- 그 때 부의 힘은 두드러질 수 없었다. 부는 이미 그 네트워크에 편입되어 장기적이 영향력 아래 분해되고, 전환되어 단독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 역사적인 시간차: 선거는 민주 제도의 발생보다 일렀다
p393.
- 탕누어의 아버지처럼 ‘자기 돈’으로 선거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5-60년대에 지역 선거에 출마했다고 한다)
- 다른 사람의 자금으로 움직이고, 승리하면 얻어낼 정치권력 안에서 그의 지분을 보장해주는 방식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부의 세계에서 최정점 일류에 속하는 사람은 절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 몇몇 이류나, 시대착오적인 인물, 심심함을 못 참는 괴팍한 부자인 트럼프 같은 사람이나 엇나간다.
p394.
- 거의 종신직에 자기 성을 계파의 이름으로 삼고, 십수 명에서 수십 명의 의원을 호령하는, 오래 주색과 돈에 빠져 얼굴이 다 변형된 요괴 같은 의원 몇 명, 그들이 비헌법적으로 부여된 그 특수한 힘을 장기간 보유해온 것은 주로 기부금을 잘 거두는 능력 덕분이며 그것으로 휘하의 의원들을 ‘지원/통제’한다
- 국민의 표가 아니라 금액에 대한 장악력과 세밀하고 영속적인 경제 네트워크에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종횡으로 난 구조에서 돈이 나고들며 그 세력은 더 촘촘해지고 더 영속적인 관계가 된다.
- 누가 아직도 자기 돈으로 선거를 하고 있다면, 어떤 지원이나 투자도 그에게 없었다는 것으로, 해프닝이나 벌인 꼴로 비참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p399.
- 부와 권력이 선거 때마다 교환되는 것은 이미 관례화 되었으며, 네트워크 관계의 재확인이자 강화일 뿐이다.
- 돈의 총액이 문제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직조되어 누구도 벗어나기 어려운, 현대의 천라지망이된 그 네트워크가 문제이다.
- 그래서 크루그먼이 오늘날의 부자는 단지 돈이 더 많은 것만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현재와 대시간]
p403.
- 돈이 많고 나이가 많을수록 이 세계에 남은 것이 적고 진지하게 대할만한 것이 별로 없다.
- 공자는 늙어가는 것조차 모를 정도(부지노지장지)로 어떤 일에 빠져있다고 했다. 사람이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달으면, 그에게 시간의 작용은 누적이지 침식이 아니다. 생장의 역정이다.
- 종교에서 천당은 차별이 허용되지도 소유의 문제도 존재하지는 않는 단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어느 종교를 택하든 돈을 낸다면 그곳에 주택 하나쯤은 즉각 분양해준다. 다만 인도 불교는 시간적으로 무한히 아득한 분양방식을 택했는데, 기한을 명시하지 않았으니 현대 부의 눈으로 보면 사기쯤 된다.
p405.
- 석가모니는 왕자시절에 각종 고난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이었고, 생로병사 앞에 비통해했다.
- 석가모니의 눈으로 보자면 인간 세상에는 바꿀 수 없고 건드리기 힘든 것이 너무나 많았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과 사고방식 하나는 잘 바꿀 수 있었다.
- 그래서 불교에서는 정의나 공공성의 시비나 선악을 말하지도 않고 오히려 어느정도의 불평등과 불의를 인간 삶의 기본상황으로 간주하는 한편, 대시간을 전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에서 벗어나 지금의 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준다.
p406.
- 불교는 자기성찰과 자기 청정을 중시해서 보르헤스는 불교에 일종의 기이하고 감동적인 우아함이 있으며 사유의 성격이 짙다고 했다.
- 기적보다 사유를, 이익보다 해답을 추구하는. 종교의 범위를 넘어서는 철학.
- 석가모니는 난세에 처한 이들, 외부 세계에서 아무 힘도 없고 자기 주장을 가질 수 없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주목했다.
(\저자가 얘기하려는 것과는 결이 다르지만, 단순히 생각하면 천주교의 지향성이나 예수도 그렇지 아니한가? 가장 낮은 곳에 향하라는 가르침은 강조의 빈도에 비해 실천으로야 무던히도 이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p410.
- 불교에서는 무한히 아득한 어느지점에 가서야 정의가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도 했는데, 무한히 아득하다는 것은 불가능과 필연, 이 배치되는 두가지를 포함한다.
- 문자언의 교묘한 장치. 고대 그리스인은 두 평행선에 대해 끝없이 머나먼 곳에 교차한다고 말했다.
- 인간의 인지력은 대개 현재에 함몰되어 있는데, 인간은 늘 자신의 ‘무지’ (소크라테스)를 깊이 되새겨 이를 의식해야 한다.
p411.
- 정의와 명예, 성불을 이 짧은 수십년의 현세에 바삐 움직여 전부 다 실현하려다 보면 쉽게 근시안적인 심리상태에 빠지고, 그렇다면 소중하고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들이 기회를 잃을 뿐이다.
- 그래도 우리 중 일부 누군가는 어느 창작물로부터 비범함과 반짝이는 빛을 감지할 것이고, 그들의 가능성은 시대를 초월할 것이라는 데에 희망을 건다.
p417.
- 존 스튜어트 밀, “겹겹의 시간의 장막을 꿰뚫어본 그의 식견”
- 민주주의가 소수의 일부에게 권력을 회수하여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은 민주주의 건설 시기에 수행되는 역사적 장애물의 제거일 뿐
- 민주주의가 정상적이라면 그것을 통해 보호받는 대상은 대다수 사람이 아닌, 수용하고 남겨야 할 한사람, 또다른 소수나 일부이다.
p418.
- 스튜어트 밀은 진리와 악과의 관계에 대해, 진리는 실패가 더 일상적인 상태이며, 심지어 철저히 섬멸되기도 하고, 현실에서 이런 일은 늘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역사에는 진리가 박해와 탄압을 받은 사례가 가득하고, 영구히 제압되지는 않았어도 몇 세기동안 퇴보하곤 했다. (….) 만약 어떤 견해가 참이면 설령 한 번, 두 번 혹은 여러 번 소멸어도 시간이 지나 재발견되곤 했다. 유리한 환경을 갖춘 시가에 재현되면 박해를 피해 점차 우위를 점하고, 그 뒤로는 자신을 누르려는 어떠한 기도에도 맞설 수 있었다.”
- 진리가 넘어졌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애보다 더 긴 호흡의 시간이 필요하다.
[표준화와 풍요와 등쳐먹기]
p421.
- 인류는 어떤 궁극적인 해결책과 통일장 이론, 만능의 신 같이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것을 찾으려 했다.
-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 이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생물적 인간을 획일화 하므로서 그들의 통일적이고 궁극적인 이론을 구축할 수 있었다.
- “인간은 역시 착실하게 힘껏 판별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거듭 훌륭한 것을 생각해내고, 말해야 하며, 옳은 일을 한 사람에게 갈채를 보내거나 적어도 미소를 지어주는 한편, 때때로 진지하게 잘 쓰인 책을 사기도 해야한다.” (\ 탕누어는 편집자 출신이다.)
p426.
- 오늘날 우리의 꿈은 더이상 실제 삶의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발달된 매스미디어와 전 지구화에 힘입어 어떤 형식과 규격의 형태로 꿈을 꾼다.
(\나는 실제 삶의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 꿈이 얼마나 제약적일지 두렵지만, 형식과 규격이 없이 꿈을 꾼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 심지어 연애도 일련의 표준 절차를 갖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먼저 올렸던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를 상기해본다. 우리는 연애담으로 대동단결 할 수 있으며, 그 희노애락과 기승전결을 살펴보면 별반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피곤한가?)
- 이제 사회는 가난한 자와 부자가 밀착해 한 덩어리가 되었고, 사람들은 자기가 얻을 수 없는 눈부신 물건들에 온종일 흠뻑 빠져있다. 자칫 삶의 기조가 실의와 낙담과 원망에 물들기 쉽다
(\그래서 나는 인스타를 멈췄고 좀더 오래 밝은 기분을 유지하게 되었다.)
p429.
- 석가모니가 노래한 극락에는 갖가지 기묘한 여러색깔의 새가 밤낮을 안가리고 평화롭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 외에도 건물의 구조나 건축자재의 묘사와 더불어 장식품과 광선의 처리, 공기 질의 조절, 소리와 색채의 선택까지 묘사되어 있는데,현대의 눈으로 보자면 어떤 이상적인 집이나 우월한 주거환경에 가깝다.
p430.
- 소설가 아청은 이를 두고” 석가모니는 자기 제자를 유혹하고 있군”이라며 농담조로 말했는데, 현대에 와서 이런 거주지는 윤회와 수행 없이도 돈으로 살 수 있다. 현세에 (돈으로) 성불하여 극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는 참으로 놀랍다.
- 역사적으로 철학자와 현인은 여러 버전의 이상적이고 살기좋은 세상의 모습을 구상했는데, 그 순수 사유의 성과들 중 일부는 놀랍게도 실현이 가능하거나 이미 실현되었으며, 대가만 지불한다면 내 것이 될 수도 있다.
- 채플린이 잠입했던 백화점의 지상층과는 달리, 백화점 지하층의 밝은 슈퍼마켓은 누구든 손만 뻗으면 가져갈 수 있는 곳으로, 태평하고, 순조롭고, 풍요롭고, 중생이 평등한, 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가장 생생한 광경이며 부의 성과가 가장 훌륭하게 반영된 한 폭의 그림이다. (예기의 하늘의 도와 땅의 보물 구절을 인용하며..)
p432.
- 인류가 거대한 재난으로 전멸한다면, 사람을 살리는 곳은 바로 지하층이다.
- 일상생활의 물건과 관련해 일본인은 편집증에 가까운 집중력과 악마 같은 상상력, 갖가지 매혹적인 장인 기술을 갖고 있다. 거품경제의 예금 저이자 시절을 거치며 한 세대 사람 전체가 거의 모든 지혜와 창의력과 자원을 기괴한 발명품의 생산에 쏟아부어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 일본의 채소, 과일, 육류, 생선은 대체로 보기 좋으며 (만족할 줄 모르고 세계 각국의 다양한 품종을 수입하고 도입하고 개량한 결과로서), 조리한 뒤의 요리도 근사하고, 차려놓으면 예쁘고, 전체적으로 풍요로운 미감을 자랑한다.
(\여기서는 할아버지의 담백하지만 뭔가 미감이 집약되었던 그 취향을 떠올리고)
- 그 대단한 철학자와 현인들도 단지 인간이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친 게 아닐까. 소비에트 혁명이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은 감자에 소고기를 곁들여 먹게 해준다는 것 뿐이었다.
(\이즈음에서는 어린 나에게 할머니가 ‘너는 참 좋은 세상에 태어났다’고 진심으로 부러워한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아래에 들어 작가는 그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들의 욕심’을 아주 간단한 말로 조소한다)
- “지금은 그저 소고기에 감자여서는 안된다. 일본 와규, 홋카이도의 단샤쿠 감자여야 한다.”
(\이 지점을 읽은 직후에 본 영상https://youtu.be/STW98zpUov8?t=57에서 샤이니의 키가 “자연산 참치김밥이랑, 대저토마토랑, 문경사과랑, 캘리포니아 오렌지주스, 에티오피아산 원두, 번개맞은 대추나무 나무젓가락”을 그 멤버들에게 (말로) 진상했는데, 과연 이것이야말로 차곡히 접힌 택배박스를 내놓고 주요 백화점 지하 선반 곳곳을 훑어 좋아하는 제품의 위치라면 이미 머리에 저장되어 있는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전형적 소비자 모습 -나도 자유롭지 않다- 이라 무릎을 탁 쳤다.)
p439.
- 산지에서 온 것들은 무슨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싱싱하기 그지없는데, 사실은 많은 자원과 인력을 들였기 때문이며 그 모든 것은 대량의 낭비로 지탱되는 전 지구적 경제 매커니즘을 바탕으로 수립되었다.
- (\이 부분은 매우 급진적인데..) 이는 개인이 선택하여 중단할 수 없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좋은 물건을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죽어도 못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 빈국과 산간벽지를 포함하는 전체 경제 체제다.
-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부모를 버리고 달려와 우리의 부모를 돌보고자하고, 열악한 공장에서 피땀흘려 일하고자 하는 덕에 우리는 하는 일 없이 휴대전화와 컴퓨터로 채팅을 하며, 셀카를 찍고, 청승을 떨고, 온종일 헛소리와 남 욕을 일삼고, 온 세상에 자기가 저녁에 뭘 먹었는지, 각종 현란한 무기와 장비로 하루에 수천 명을 죽일 수 있다.” (\가히 영상의 빠른 편집을 방불케하는 글이다)
- “우리가 확실히 조금 등치고 있다는 것을, 이 지구를 등치고 있다는 것을, 그 와중에 기뻐하든 슬퍼하든 꼭 기억해둬야한다.”
[한계와 희망, 실의와 극복에 대하여]
p442.
- 인류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이 작은 행성이 견뎌낼 수 있는 마지막 한계를 시험하는 지경으로 거대해졌다
- 발전으로 발전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으로 성장의 위기에서 벗어났던 과거의 기계적인 사유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p445.
- 과거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일찍이 인류에게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을 가졌고, 단지 희망을 잃었을 뿐이다”
- 경제적인 수치야 약간의 기복이겠지만, 이런 조정은 사회에 연쇄적인 불안과 혼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사람의 마음에는 우울, 분노, 절망이 생겨난다.
- 오늘날 실의의 분위기는 아시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세계에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다. 인류는 결국 굶어죽기 보다는 실의를 택할 것이다.
p447.
- 경제문제는 모종의 편재하는 불안요소로서 인간의 현실조건을 구성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경제 수치보다 형편없으며, 실망과 자기연민, 울분과 공격성이 기본 정서이다. 이것이 실의에 빠진 이들의 사회이다.
- 이런 사회에서는 불공정한 자기 치유방식으로 ‘희생양 찾기’ 게임이 일어난다.
- 중세의 마녀사냥, 유대인 박해가 그 게임의 역사적 사례이다. 이기심, 잔인함, 살인충동, 난무하는 거짓말, 집단적 광기와 득의양양해 하는 모습까지, 인간의 본성이 마치 산이 무너지는듯한 속도로 원시와 야만과 무지를 향해 뒷걸음질쳤다.
(\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여기서 연상한다. 혹시 세상이 여기에 열광한 이유가 꼭 그 자신이 담겨져있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서는 아닌가? 아직 볼 용기가 없어 시청 전이다.)
p450.
- 사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누구도 설득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어떠한 표정을 짓거나 어떠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 사회가 추락하지 않게 지켜줄 것은 기발한 경제전략이 아니라, 방치하고 무시해왔던 오래된 기본 가치관념이다.
- 대외의존도가 높은 (/타이완은 70%정도, 한국과 그렇게 다른 사회가 아니다)바, 어차피 경제문제에 대해 독립적인 주장을 갖기 어렵고 전지구적 경제에 대해 순응을 할 뿐이다.
p454.
- 2300만 인구의 시장 단독으로 경기 활성화를 시도하는 경제전략보다야, 가치에 대한 신념을 논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다.
-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라 앞서 고성장을 해낸 일본이 앞장서 다다른 ‘정상적인’ 단계일 뿐이다. 사회 전체가 구조, 법규, 제도, 생활습관, 사람들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조정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며, 서두르고 싶어도 서두를 수 없다.
[창작자의 명예]
p461.
- 염가에는 여러 환산법이 있지만, 인류에게 선물과 축복 같은 한 사상가나 저자가 평생 자신을 불태워 남긴 성과(/책)를 우리는 겨우 운동화 한 켤레 가격(150 TWD)으로 살 수 있다.
- 이것이 저자가 잘 알고 뜨겁게 사랑하는 한 세계다 (\그는 편집자 출신이다)
p470
- 편집자는 양립할 수 없을 법한, 부의 신과 명예의 신을 동시에 모셔야 한다. 그런데 서점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양태를 보면 그 이중의 정체성에 호응한다. 베스트셀러를 뒤적이다 서가 맨 위칸의 어떤 책에 손을 뻗는 것이다.
- 세계 전체가 부를 향해 기울어지고 독자도 소비자라는 비교적 마음 편한 정체성만 남기며 서점은 소매업 매장으로 변했지만, 그 중 저자가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책의 세계에 나타난 사람들의 변화된 의식이다.
p473.
- 절대 평등이 많은 것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사회주의에 대한 경계가 드러난다) 평등의 사유에는 한계가 필요하나, 그럼에도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관계의 토대이며 가능성이고 절대로 양보하거나 취소해서는 안되는 최종 한계선이라고 생각한다.
p476.
- 영화는 규모와 비용이 너무 크고 비싸서 부의 세계가 행사하는 지배력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 그래서 허우샤오시엔의 그 자유를 많은 감독이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그 자유는 본인의 명예와 이익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무모함 덕에 확보할 수 있었다.
p477.
- 저작자에게 진정한 명예는 죽고 난 뒤에, 작품이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을 거치며 다양한 사유와 시각으로 조명되며 완성된다.
- 그래서 작가와 창작자는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이나 기록한 것, 해괴한 생각이나 통제못한 감정, 교정과 인쇄과정의 착오 등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편이 좋다.
- 즉, 모든 작품은 점검과 비판을 감수해야 하고, 명예는 이 다음에 주어진다.
p478.
- 일본의 료칸은 두 타입으로 나눠볼 수 있고, 그 중 하나는 자신들이 가장 좋고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요리와 서비스를 내놓는다. 손님은 방문하여 접대방식을 ‘받아들인다.’
- 그렇지만 교토의 유명한 다와라야 료칸은 사흘 넘게 묵을 필요가 없다고 손님에게 완곡히 알려주는데, 사흘이면 그들의 접대 사이클과 여정은 다 끝나기 때문이다.
- “손님의 기존 습관에 없고, 손님이 벌써 알고 있거나 익숙한 것을 훨씬 능가하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답니다.”
p488.
-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가지 미리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는 부조리가 숨어있다.
- 사람이 남기는 것은 작품이지, 그 사람 본인이 아니다. 작품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며, 저자 본인이 거기에 딸려가는 경우는 드물다.
[마무리]
p493.
-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것을 현재적 삶의 위치로 돌려놓고, 미래와 단절하고 허무로 귀결하여 시간에 유한성을 부여했다. 그 기묘한 시간의식으로 사람들을 어지럽히는 잡념을 내려놓게 했다.
- 미래가 현재로 축소하거나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그 시간의 소실점까지 멀리 확대하는 것이다.
p495.
- 글쓰기의 진정한 목표가 ‘미래’이기는 어려운데, 우리는 그정도로 확장하여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밀도가 모자란 것이다. 현재는 진행형이고, 우리가 지금시점에서 보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하나 미완성이고 정지되어 있으며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 현재를 비교적 완벽하게 살려면, 미래에 ‘밀입국’하여 현재를 돌아봐야 한다.
- 미래 요소의 증가는 현재 현상에 대해 바로잡으려는 시도나 분노를 의미한다.
p504.
- 체호프와 고골은 톨스토이와 푸시킨이 쓸 수 없는 글을 만들었는데, 기교가 아닌 경험의 차이가 낳은 산물이었다.
- 점차 작가의 지위와 신분은 위에서 아래로 조정되었지만, 그로 인해 글쓰기의 범주는 더 넓어졌다.
- 그래서 작가가 생활하는 곳이 어디든, 그 세계는 활짝 열려 우리 시야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 작가가 너무 잘살면 문학은 못살고, 작가에게 희망이 생기면 문학적 글쓰기는 그것을 잃는다.
- 되려 희망은.. 한눈팔지 않는 글쓰기의 집중에 있다.
p507.
- 중국의 글쓰기 호경기 수혜자들(1980년대 작가들)이 누리던 것과는 달리, 이제 그 거대한 도서시장은 빠르게 통속화될 것.
- 실낙원같은 아름다운 기억과 기대를 뒤로하고, 실의와 실망의 발걸음으로 서서히 무거워지는 현실에 접어들 가능성이 크다. 이탈로 칼비노가 예로 든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페르세우스처럼 스스로 신체부터 정신까지 경쾌해질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나의 요즘은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대로 경쾌한 상태를 유지하자는 기조라서 이 부분이 눈에 띈 것 같다.)
- 중국의 글쓰기 시장은 오늘날 글쓰기 제재의 사치, 작가가 누리는 명예의 사치, 물질적 보수의 사치를 누리고 있는데, 사치는 오래 가기 어려울 뿐더러, 가장 피할 수 없는 위험은 누리는 사람에게 습관이 된다는 것이다.
